대마도에 대해서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에 딸린 섬. 위치 :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 면적 : 695.9㎢ 인구 : 약 4만 5천(1997) 본문 면적 695.9km2. 인구 약 4만 5천(1997). 중심도시는 이즈하라[嚴原].중앙부의 아소만[淺茅灣]과 인공적으로 굴착된 만제키세토[萬關瀨戶:瀨戶는 水路]에 의해 상 •하 두 섬으로 나뉜다. 섬 전체가 해발고도 400m 내외의 산지이고, 산지의 계곡들은 곡벽이 험준하다. 예로부터 한국과 대륙 사이의 중계지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여 대외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부산에서 약 50km의 거리에 있어 한국과 관계가 깊었다. 고려 말부터 조공을 바치고 쌀 •콩 등을 답례로 받는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왜구가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출몰하자, 조선시대에 들어와 회유책 •귀화정책 등을 쓰다가 세종 때에는 원정(遠征)에 나선 바 있다. 1274년 1281년 두 차례 몽고군이 상륙했다. 뒤에 쓰시마도주(島主) 소[宗]의 간청으로 조선이 삼포(부산포 •염포 •제포)를 개항하자, 쓰시마는 에도[江戶]시대 말기까지 대(對)조선무역을 독점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 수군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농경지는 총면적의 4%에 불과하고 계단식 밭이 많으며 최근까지 화전 경작을 했다. 산촌에서는 숯 구이와 표고버섯 재배가 주업이었으나 조림이 이루어졌다. 오징어 •도미잡이와 전복 •소라 •성게 •천연김 채취를 하고, 아소만에서는 진주조개 양식이 성하다. 중심도시 이즈하라는 13세기 중엽 이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이르기까지 쓰시마를 지배해온 소씨[宗氏] 일족의 거성(居城)이 있던 곳으로 성터와 그 시주사 등이 남아 있다. 부산에서 정기여객선이 1주일에 2차례 운항되고 있다.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증거들 "너희 섬(:대마도)은 조선 지방이니, 마땅히 조선 일에 힘을 써야 한다." ― 에도 막부 장군의 측근이 대마도 고위관리에게 한 말. 서기 1617년 통신사 이경직이 자신들(통신사 일행)을 수행하던 대마도의 고위관리에게 이 말을 듣고 적어 놓았다. 대마도는 … 대대로 우리 조정의 은혜를 받아 조선의 동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으니, 의리로 말하면 임금과 신하 사이요, 땅으로 말하자면 조선에 부속된 작은 섬이다. ― 서기 1590년, 임진왜란 직전에 통신사 부사로서 일본을 다녀온 김성일이 조선에 돌아온 뒤 낸 보고서에서 우리 대마도에게 조선 영토 안의 주 군(州 郡)의 예에 따라 주(州)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 : 도장)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 서기 1419년 대마도 정벌 뒤에 대마도주가 보낸 서신에서. (전략) … 이곳은 일본 국왕의 명령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중간에서 망령되게 자존하면서 포악하오나, 이들 모두 도서(圖書)를 받고 우리 조정에 귀순하기를 바라고 있사오니, 바라옵건데 이 섬의 두목들에게 예전처럼 오고 가게 하고, 이따금 양식이나 주고 도서를 주어 뜻밖의 우환에 대비하게 하소서. ― 서기 1444년 대마도에 보내졌던 초무관 강권선이 세종에게 보고한 글. ------------------------------------------------------- 11세기 후반(1000년경)부터 13세기 후반(1200년경)까지 200여 해 동안 대마도의 고려에 대한 진봉관계가 연구로 밝혀지고 있습니다.(대마도는 고려 때에도 우리의 영토였음) ------------------------------------------------------- 『산가요약기(山家要略記)』(:12세기 말 일본 천태종의 승려가 쓴 책)에 말하기를 "대마도는 고려국의 목(牧 : 목장)이다. 옛날에는 신라 사람들이 살았는데, 개화천황(開化天皇)대에 이 섬(대마도)으로부터 (일본본주로) 습래(襲來)해 왔다. 중애천황이 풍포궁에서 대마도를 거쳐 신라를 정벌함으로써 마침내 이 섬을 얻었다."고 하였다. ― 1723년 대마도인 등정방(藤定房)이 쓴 대마도의 역사서인『대주편년략(對州編年略)』에서 무릇 대마도는 옛날에는 신라국과 같은 곳이었다. 사람의 모습도 그곳에서 나는 토산물도 있는 것은 모두 신라와 다름이 없다. ― 13세기 말의 일본 책인『진대(塵袋)』 제 2권에서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는 선종 2년(1085) 이래 대마도주를 '대마도구당관(對馬島勾當官)'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이 점이 시사하는 바는 상당히 흥미롭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는 제주도의 성주(星主)를 '탐라구당사'(耽羅勾當使)로, 일기도(대마도와 구슈 섬 사이에 있는 이키 섬) 도주(島主)를 일기도구당관이라고 명명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당관은 고려시대 변방 지역 내지 수상(水上)교통의 요충지를 관장하는 행정 책임자들에게 붙인 관직명이다. 이를 보면 탐라, 대마도, 일기도의 지배자에게 고려가 구당사 혹은 구당관이란 명칭을 붙인 의미를 알 수 있다. 즉 앞의 세 섬을 고려의 속령(: 영토로 속한 땅)으로 인식하였거나 아니면 고려 정부가 대마도와 제주도를 고려 고유의 지배 질서 속에서 같은 차원으로 취급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하우봉의 논문『한국인의 대마도인식』에서 대마도는 섬으로서 본래 우리 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어놀기 시작하였다. ― 태상왕이었던 태종이 세종 때 대마도 정벌을 하기 전에 군사들에게 내린 교유문에서 대마(:대마도)는 섬으로서 경상도의 계림에 예속되었던 바 본시 우리 나라 땅이라는 것이 문적(文籍 : 서적, 기록)에 실려 있어 확실하게 상고할 수 있다. 다만 그 땅이 매우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들이 살지 않았을 뿐이다. 이에 왜놈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 갈 곳 없는 자들이 몰려와 모여 살며 소굴을 이루었던 것이다. ― 대마도를 정벌한 뒤 대마도주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마도는 본래 조선의 목마지(牧馬地 : 말 기르는 땅)이므로 대내전(大內殿)이 조선과 더불어 협공하여 대마도를 귀국(:조선)에 돌리고자 하다가 불행히도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의 영주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 대마도 정벌 이후 일기도로 파견된 조선 관리인 강권선에게 일기도 영주 대내전(大內殿)의 관반(館伴)인 노라가도로(老羅加都老)가 한 말. 풍신수길이 조선 침략에 대비하여 무장에게 명령해서 만든 지도인『팔도 전도』에는, 독도 뿐 아니라 대마도도 조선의 땅으로 나와 있으며, '공격 대상'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일본도 대마도를 일본 땅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