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엄청나게 깁니다. 내자신의 정체성과 진정한 뿌리를 안다는 것은 무척 중요한 것이랍니다. 깨어있는 민족의 일원이 되시기를 기원하면서 인내심을 갖고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단군조선 말살과정 1. 총독부 우리 史書 20만권 불태워 일제는 한국 상고사의 말살을 한국의 강제 병탄이전부터 강력히 추진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1910년 8월 29일 조선을 강탈한 후 이해 10월 1일 관보를 발행하는 놀라운 기동력을 보인다. 이 관보는 조선을 영원히 탈취할 것으로 착각한 그들이 만든 것이므로 이제는 오히려 일제의 조선 침탈사를 밝히는 귀중한 자료이나 아쉽게도 번역이나 집중적인 연구가 되지 않은 실정이다. 1910년, 이른바 그들이 주장하는 '일&#8226;한합방'이 되자 초대 총독은 취임하자마자 조선의 관습과 제반 제도 조사를 명령했다. 조선총독부 취조국은 식민지를 제압하기 위해 설치한 가장 악질적인 기관의 하나로 초기에는 법령의 제정과 형벌을 관장했다. 일제의 무단정치를 악질적으로 수행한 관서였다. 조선의 관습과 제도조사라는 미명을 내세운 취조국은 1910년 11월 전국의 각 도&#8226;군 경찰서를 동원하여 그들이 지목한 불온서적의 일제 압수에 나섰다. 서울에서는 종로 일대의 서점을 샅샅이 뒤졌고 지방에서는 서사(서점), 향교, 서원, 구가, 양반가, 세도가를 뒤졌다. 다음 해 12월 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1차 전국 서적색출에서 얼마나 압수하였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다. 다만 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판매금지한 서적과 수거된 서적은 총 51종 20여만권이라고 광복 후 출간된 <제헌국회사>와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문정창)>가 밝히고 있다. 압수대상 서적은 단군관계 조선고사서, 조선지리, 애국충정을 고취하는 위인전기&#8226;열전류 및 심지어 '미국의 독립사'까지 포함되었다. 장지연의 '대한시지지(大韓新地誌), 이채병의 '애국정신', 신채호의 '을지문덕' 등이 집중적인 수난을 받았다. 이는 일제가 조선사를 말살하려고 한 공개된 첫 만행이었다. 총독부 취조국은 필요한 일부 서적, 즉 조선사를 왜곡 편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만한 서적만 남기고 모두 분서하였다. 무단정치로 악명이 높던 寺內正穀는 총독부 취조국이 관장하던 관습&#8226;제도 조사업무를 1915년 허울뿐이던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편찬과를 설치하여 '조선반도사' 편찬을 담당시켰다. 일본인들이 이나라 사서를 인멸했을 뿐 아니라 직접 손을 대어 왜곡 편찬을 노골화한 것이다. 이완용, 권중현 등 부일(附日) 역적들을 고문으로 앉힌 중추원은 1916년 1월 유정수 등 중추원 참의와 경도제국대학의 三浦周行 교수와 경도제대 今西龍 강사 등 3인에게 지도&#8226;감독을 의뢰했다. 새로운 조선반도사를 만들려는 일제는 전국에서 압수&#8226;분서한 이외, 그들이 조선사 왜곡을 위해 근거 자료로 일부 사서를 남겨두고 총독부 취조국에서 중추원 편찬과로 편사업무를 이전하기 앞서 이들 자료의 철저한 분석과 왜곡 편사 계획을 수립했음이 분명하다. 조선반도사 편찬을 맡은 어용학자들에게 내린 편사지침이 이를 증명한다. ① 조선반도사는 편년제(編年制)로 한다. ② 전편을 상고삼한, 삼국, 통일후의 신라, 고려, 조선, 조선 근세사의 6편으로 한다. ③ 민족국가를 이룩하기까지의 민족의 기원과 그 발달에 관한 조선 고유의 사화, 사설 등은 일체 무시하고 오로지 기록에 있는 사료에만 의존한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7쪽, 47쪽) 조선총독부는 이 같은 편사 원칙을 세우고 '공명 적확'한 조선사를 편찬하려면 사료가 필요하다는 명목을 붙혀 이번에는 중추원을 앞세워 전국적인 사료 수색을 다시 감행한다. 겉으로는 중추원이 사료 수집을 맡아 대여 방식 등의 다소 완화된 태도를 보였으나 실지에 있어서는 각 도청, 군청, 경찰서 등이 위압적인 방법으로 수색했다. 이 나라 역사와 전통, 문화, 예술, 인물 등 제2차 수색에서는 압수 범위도 오히려 늘어났다. 즉, 전기, 열전, 충의록, 무용전까지도 압수되었던 것이다. 1919년 3&#8226;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어쩔수 없이 무단정치를 철회하고 문화정치를 표방했다.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조선총독은 조선사람들을 半일본 사람으로 만드는 이른바 교육시책의 하나로서 1922년 12월 훈련 제64조 조선사편찬위원회 규정을 제정, 공포하여 새롭게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15명의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2. 역사 왜곡편찬 진용확대 개편 일제는 「편찬위원회의 조직근거 법령이 조선총독부의 훈령으로 되어있어 유능한 조선인 사학자들이 모이지 않는다」고 지적, 명칭을 「조선사편수회」로 바꾸고 일황의 칙령으로 설치근거의 격을 높였다. 일제는 1925년 6월 일황 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 관제를 제정 공포하고 조선총독이 직할하는 독립 관청으로 승격시켰다. 이 편수회의 위원장급 회장들로는 현직 정무총감들이 맡아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본인들을 참여시키고 실무자들의 관직도 높여 상당한 대우를 함으로써 실력있는 학자들을 유혹했다. 새롭게 정비된 조선사 편수회는 사무소를 총독부 중추원에 두고 1925년 10월 8일 제1회 위원회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결정한 주요 사항은 관계 자료의 수집 방안이었다. 강제 수색&#8226;압수가 초기에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수장자들이 비장하는 바람에 수집이 어려워지자 일제는 대여하는 형식으로 그 방법을 완화했다. 총독은 관계자들에게 편찬사료 탐방이란 이름으로 광범위한 사료수집을 독려하는 한편 전국의 도&#8226;군&#8226;경찰서 등 관청에 협력토록 강력히 지시했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는 大正 11년(1922년), 즉 조선사편수회가 확대 개편되기 이전부터 사료를 수집했음을 밝히고 있다.(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92쪽). 1922년 8명의 관계자가 연 122일을 출장했으며, 23년에는 17명이 연204일, 24년에는 12명이 연 176일, 25년에는 15명이 연200일 동안 전국을 누벼 조선사료를 찾아내었다. '조선사편수회'의 제1회 회의에서는 다시 조선사의 시대구분을 재편, 조선상고사를 말살하려는 저의를 보인다. 1923년 1월 8일 '조선사편찬회'가 결의한 제1편「삼국이전」을 다시 끌어내려 「신라통일이전」으로 하고 제2편「신라통일시대」, 제3편 「고려시대」, 제4편 「조선시대전기」, 제5편 「조선시대중기」, 제6편 「조선시대후기」로 편수마저 7편에서 6편으로 1편을 줄였다. 단군조선 등 상고사를 집어넣기로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 때 결의한 사항을 폐기하고 '조선사편찬위원회'의 결의마저도 축소하여 '조선사편수회'에서는 6편으로 편수까지 줄인 것이다. 편수까지 줄인 것은 「삼국이전」과 「삼국시대」를 줄여 「신라통일이전」으로 통합했기 때문이다. 조선사의 시대구분 문제는 조선사가 완간될 때까지 조선 위원들에 의해 거론되고 끈질긴 공방전을 낳았다 [주간조선] 1985년 10월 20일∼ 1986년 10월26일 연재 현재 "잃어 버린 역사를 찾아서(전 3권)"로 나와 있음. 3. 사료 선별수집&#8226;복본 행방불명 조선사편수회의 회의록 가운데 중요한 부분들을 보기로 하자. 1928년 7월 18일 중추원에서 열린 고문&#8226;위원간담회에서 나온 주요 발언은 다음과 같다. ● 山梨 총독 : 앞서 본회가 조선 사료의 수집&#8226;정리와 조선사 편찬의 사명을 가지고 창립되자 고문과 위원 각위들은 열심히 그 취지를 원조하고 각 직원들은 근면히 사무에 종사하여 상당한 성적을 올리게 된 것을 다행하게 생각한다. 해가 거듭할수록 인멸되어 가는 사료를 수집하여 공정한 조선사를 만들려는 것은 본회 창립 당시에 비하여 더욱 절실한 소망일 뿐 아니라 조선 통치상으로 보아 긴요한 일로 믿는다. 여러분은 더욱 노력하여 이 사업이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노력해 달라. ● 池上정무총감 : 본회 사업의 경과를 보면 사료의 수집이 예정의 절반을 완료하였다. 이것은 여러분들과 일반인들이 귀중한 사료의 수집과 편찬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편의를 제공한 때문이며 참으로 만족한다. 앞으로 1∼2년이면 일반 수집을 마칠 예정이니 여러분은 물론, 일반인들도 더 한층 편의를 제공하여 줄 것을 간절히 바란다. ● 黑板勝美 : 나는 다행히 여기에 참석하여 이 자리에 함께 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이 조선사의 편수에 관하여 나는 처음부터 상담에 응해 왔다. 최초에는 10개년에 역사 편찬을 완성하게 되었었으나 진재(震災, 1923년) 때문에 연장하여 12년간에 전부 완성하기로 했다. 사료는 각 도, 각 지방에 있는 것은 물론 일본, 지나(중국) 및 만주에 있는 것도 수집하여 가장 공정한 조선사를 편수하는 것이 목적이다. 위원과 고문 각위의 협력으로 벌써 사료 수집도 과반을 마쳤으므로 편수의 체제와 강령을 정하고 그에 따라 편찬을 진전시켜 오늘에 이르렀다. 이 사무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을 단계에는 여러분의 기탄 없는 의견을 듣고자 하나 실은 자료가 너무 호한하고 그 수집 정리 및 편찬에 대해 수사관도 상당히 곤란을 받고 있는 실정이므로 충분히 연구하여 우선 완성한 다음에 심사를 앙청하기로 했다. 1930년 8월 22일 오전 9시 중추원 제5회 위원회. ● 최남선 : 편수에 관하여 질문이 있다. 첫째로는 제1편의 편수 범위에 관한 것이다. 요람에 의하면 「신라통일 이전」이라고 되어 있으나 심히 막연하다. 무릇 반도 안에 살았던 민족으로서 역사상 밝혀진 것은 어느 정도까지 채택하는 것인가? 견해에 따라서는 종래 반도사에서 제외된 것이라도 반도에 심히 복잡한 관계를 가진 민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둘째는 제6편은 갑오개혁까지 편수한다는 것인데 그 이후의 것이라도 중요한 것은 어떻게 다룰 작정인가? ● 今西龍 : 제1편에 관해서는 담당자인 내가 말하겠다. 무릇 고대의 역사를 수찬함에 있어서는 「민족」을 위주로 하느냐, 「토지」를 위주로 하느냐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따라서 주된 민족의 흐름의 관계가 있는 한, 또한 그 설명상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주변 여러곳의 기사도 당연히 채택한다. 예를 들면 고구려 같은 것은 그 지역이 반도 밖에 걸쳐 있었으니 물론 채입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과 같다. ● 최남선 : 구체적으로 말하면 숙신(肅愼)같은 것은 아직 불명한 채로 남아 있는 민족이나 나는 조선사의 기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그 이후에 내려와서 발해(渤海)도 조선사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런 사실들은 어떻게 선택할 방침인가? ● 今西龍 : 「숙신」은 연대상 역사로 취급하기보다는 인류학 민족학의 연구범위에 들어가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발해도 조선사에 관계가 없는 한 생략하겠다. ● 최남선 : 참고로 말하겠다. 무릇 고대사는 「민족」본위로 하는 경우도 있고 「지리」본위 또는 「문화」본위로 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경우라 하더라도 매우 복잡하고 모호한 상태이겠으나 민족의 기원을 밝히기 위하여는 가능한 모든 전력을 다 할 필요가 있다. 조선 고대 민족에 관한 사료는 조선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지나(중국)의 여러 사적에서도 산견되고 있으므로 조선사를 밝히기 위하여는 사소한 것까지도 면밀하게 조사하여 유루가 없도록 할 필요가 있다. 조선 민족은 인류학상으로도 아직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므로 조선의 민족문화를 밝히기 위해서는 차라리 동방 제 민족의 관계 사료를 전부 하나로 종합&#8226;정리하여 주기를 바란다. ● 今西龍 : 최위원의 말에 대해 담당자로 깊이 감사한다. 다만 여기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일은 「사료」와 「사설」을 구별하는 것이다. 「사료」는 될 수 있는 대로 수집하겠으나 「사설」을 수집하면 끝이 없기 때문에 채용하지 않는 것이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에 따르면 중추원에 편찬과를 설치(1918년 1월)한 후 조선사편수회로 개편(1922년 12월)하기 직전까지 「상고삼한」, 「삼국」, 「통일 후 신라」, 「조선」 등 4편의 원고를 탈고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들 원고의 일부는 조선사편수에 참고했겠으나 「통일신라 이전」의 2편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아무런 언급이 없다. 또 하나 조선사편수회 제4회 모임 때 거론된 대학이나 학교 도서관에 비치하겠다던 수많은 사료들의 복본들 역시 행방이 나타나지 않는다. 조선사편수에 참여했던 일본인 학자들이 스스로 조선의 사료가 너무 많아 본편에 처리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던 이들 사료들과 그들이 작성한 조선상고사의 일부는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들이 패망할 때 완전히 소각하지 못했다거나 모두 가져갈 수 없었다면......? 광복 40년만에 뒤늦게 공개되는 이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처럼 우리 나라의 어느 곳에 사장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4 '삼국유사',단군신화설도 조작 조선총독부는 「조선사」의 간행을 서둘렀다.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35권의 「조선사」 가운데 처음 인쇄된 것은 제1편(통일신라이전) 1, 2권과 제2편 (신라통일시대) 1권 등 모두 3권으로 1932년 3월 31일 출간됐다.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사의 편찬이 중요한 사항이므로 최소 2개월에 한번이라도 편찬위원회나 실무수습회를 계획해 열겠다고 항의했으나 이러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원고의 심의없이 조선사의 일부가 간행되자, 육당 최남선이 강력히 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조선사편수회의 제6회 위원회가 개최된 것은 조선사의 첫 3권이 나온 약 4개월 후인 1932년 7월 21일이었다. 사전 협의 없이 조선사의 일부가 간행된 것에 분노한 육당은 일제의 조선사 왜곡 의도를 간접적으로 지적하여 그들의 시인을 받아낸다. ● 최남선 : 原典의 인용이나 고감(故勘)에 있어서 일하신 분들의 노고가 마음에 걸리는 바 없지 않으나 가일층의 배려를 바란다. 예를 들면 고구려 동명왕의 곳에 인용된 "삼국유사"의 단군고기(檀君古記) 가운데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고 되어 있어야 할 곳을 후에 천인(賤人)의 망필로 말미암아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고 고쳐진 것이 그 하나다. 다 알다시피 단군고기는 본시 상당한 여러 고기록을 종합한 것을 극히 간명하게 축약한 것이므로 짤막한 몇 마디나 글씨 한자에도 어떤 경우에는 매우 중대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더욱이 '환국(桓國)' 즉 '환나라'와 '환인(桓因)'사이에는 전문의 해석상 예부터 수상하지 않게 논쟁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경도대학의 영인본(影印本)에 의한 것이라고 하고 있으나 그 원서의 환인(桓因)의 '인(因)'자가 '국(國)'자 위에 칠을 하여 '因'자로 고쳐 놓은 것을 일견하여 바로 알 수 있다. 고전을 인용하는 경우에 가령 극히 명백한 오류하고 하더라도 이것을 함부로 경망스럽게 개찬한다는 것은 심히 부당하다는 것은 새삼 제론할 필요조차 없다. 현재 이 사서에서도 이 점에 대한 경건하고 예민한 배려가 있어야 될 줄 안다. 이상 지적한 몇가지는 잠깐 동안 발견한 것이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사편수회 제6회 위원회에서 「삼국유사」의 개찬을 지적, '천인의 망필'이라고 울분을 터뜨린다. 육당의 지적은 「삼국유사」 정덕본의 正本이 발굴되어 今西龍 등 일본인 학자들이 개찬한 것임을 확연하게 입증하게 되었다. 일본 경도제국대학 강사로 있다가 三浦周行교수를 따라와 조선사 편찬 초기부터 16년 2개월 20일 동안 관여하다가 사망한 今西龍은 1921년 「단군고(檀君考)」라는 단군신화설을 만들어 그 모교인 경도제대에 「조선고사의 연구(朝鮮古史硏究)」라는 논문을 제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조선 중종 7년(1512년) 경주부윤 이계복이 중간(重刊)한 「삼국유사」 정덕본(正德本)의 고조선기(古朝鮮記)중 「國」자를 「因」자로 변조, 출간하여 경도제대의 영인본(影印本)이라 하여 각계에 배포했다. 今西龍의 이같은 개찬작업은 그의 박사 학위논문인 단군신화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악용되었을 뿐 아니라 각계에 널리 유포시킴으로써 지금까지도 일부 「삼국유사」 해설 서적들이 조작된 기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옛날에 환국(桓國)이 있었다'는 기사를 환인으로 바꿔, 고조선의 입국(立國)사실을 깎아 버리고 환인과 환웅의 신화적인 존재로 조작한 원문은 '昔有桓國<謂帝釋也>庶子桓雄......>으로 되어있다. 「삼국유사」에서 단군(檀君)도 '壇君'으로 표기되어 있다. 5. 단군,기자도 '신화'로 조작 육당 최남선이 단군관계를 집요하게 추궁한 것은 소화 9년(1934년) 7월 30일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열린 제8회 조선사편수위원회의 때였다. ◆ 최남선 : 단군, 기자는 '조선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본회의 '조선사'는 이를 수록하여야 할 제 1편에 수록하지 않고 있다. '잔무(殘務)'를 정리할 경우에 정편(正編)이나 혹은 '보편(普遍)'으로 하여 단군, 기자에 관한 사실을 편찬하여 주기 바란다. ◆ 稻葉(도엽) : 단군이나 기자는 제 1회 위원회 때에도 논의가 있었는데 우리들도 결코 등한시하고 있지 않다.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본회의 편찬 방침으로 채용한 '편년체'의 형식에는 이것을 채용할 장소가 없다. 즉 어느 왕,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기사를 넣을 것인가. 그 판연한 年次가 없으므로 우리들도 고심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수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본편에 채입하지 못하였으니 어떠한 방법으로 이것을 채입하여야 좋을지, 별편이냐, 보편이냐 교시하여 달라. ◆ 최남선 : 나는 제 1회 위원회의 일은 모른다. 단군, 기자 문제를 등한시하지 아니한다고 하니 매우 반가운 일이다. 이것을 채입할 장소에 관하여는 필경 기술적인 문제이나 단군, 기자는 그 사실만에 집착하지 말고 그 사상적, 신앙적으로 발전된 것을 종합 정리하여 '별편'으로 편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 黑板(흑판) : 단군, 기자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신화적인 것으로서 사상적, 신앙적으로 발전한 것이니 사상적 방면으로 별도로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편년사'에서는 취급하기 곤란하다. 물론 이러한 사상적 신앙적인 것이 정치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가져왔는가 하는 것은 심히 중요한 문제이나 만약 이것을 '별편'으로 하여 편찬한다고 하면 똑같이 사상&#8226;신앙적 방면에 중요한 전개를 하여 온 유교, 불교도 역시 별도로 편찬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본회의 사업이 자꾸 지연되어 있으므로 이 점은 최위원이 양해하기 바란다. ◆ 稻葉(도엽) : 단군, 기자에 대한 우리 편찬자 측으로서 편찬경과에 대하여 잠시 말씀드리겠다. 제 1편의 조선사료에 단군 기사를 수록하지 않았던 것은 해당 사실이 기본 사료로서 결정 채용된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기자는 이미 지나(중국) 사료 중에 충분히 수록하였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단군의 기사에 관하여는 고려 공민황 전후의 인물인 백문보(白文寶)가 단군의 연대에 대해 상소한 것이 있고, 또 이조 세종때에 이(檀君)를 사당에 모시어 제사지내는 일을 여러 가지로 논의한 일이 있다. 그러므로 내 생각으로서는 '백문보'의 기사 대목이나 '세종'의 기사에 이를 채입하는 것이 어떠할까 생각한다. 요컨대 우리는 단군에 관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이를 채입하려고 하였으나 '편년사'에는 이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별편'으로 하는 일은 다시 상담하기 바란다. ◆ 小田(소전) : 단군 문제는 편찬 간사로부터 이것을 채입하려고 하는 고심담도 있었으나 옛날의 '편년사'에 있어서는 이를 '외사(外史)'로 따로 취급한 예가 있으므로 '별편'으로 하여 편찬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 이능화 : 단군, 기자는 심히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연대가 불명하기 때문에 본편에 수록하지 못하고 '별편' 문제가 논의되고 있는데 내 생각으로는 그에 관한 사료가 아주 적기 때문에 '별편'으로 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삼국유사》, 《동국통감》 및 기타 중국 사람들의 설(設)을 모아서 도엽간사가 말한 바와 같이 고려 '백문보'의 곳이나 '이조세종'의 곳에 수록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 今井田(금정전) : 단군, 기자 문제에 관하여는 여러분의 주장을 고려하여 다시 타당한 방법을 강구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완전한 것으로 할까한다. 본회의 사업은 대체적으로 예정기한을 어기지 않고 소화 10년도(1935년)에 완성하고자 하나 기한 때문에 불완전한 것을 완성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불완전한 부분은 '잔무'로서 정리할 방침을 취하도록 노력하겠다. 또한 이외로 사상, 신앙 및 기타 문화면에 관하여는 후일 다시 고려하겠다. 금후 제위께서 가일층 진력하여 줄 것을 기대한다. --------------- 육당이 강력히 조선상고사의 추가수록을 요구하자 今井田 정무총감은 논쟁을 중지시키려는 듯 단군에 관하여는 여러분들의 주장을 고려하여 다시 타당한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얼버무리고 이 회의를 끝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도엽간사와 흑판 고문의 발언이다. 그는 '단군과 기자는 조선사편수회의 편찬방침이 〈편년체〉로 되어있어 포함 할 수 없다'고 강변했다. 흑판은 이 보다 한발 더 나가 단군과 기자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고 〈신화〉라고 못박았다. '조선사'의 편찬 방침을 '편년체'로 결정한 것은 바로 단군조선을 없애려는 의도임이 여기서 드러난다. 수천년 전의 고대사를 편찬하면서 '몇년 몇월 몇일'에 그런 사실이 있었느냐면서 자료를 제시하라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억지인 것이다. 이렇게 '조선사'의 상고사를 없애면서도 일제는 30권으로 예정했던 편찬계획을 바꿔 35권으로 확대했다. 이는 일본인 고문과 간사가 스스로 밝혔듯이 그들은 수집된 자료가 너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은 이들 사료 중에는 세상에 유포되지 않은 희귀 유일 사료도 있다고 했다. 조선사편수사업개요를 보면 제 7회때 흑판고문이 '사료총간'목록을 각 위원에게 배부한 것으로 되어 있다. 흑판고문은 당시 이런 말을 했으며 회의록에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수집사료와 규장각 등에 소장된 것 중에는 한번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있다. 특히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당장서화첩(唐將書畵帖)》, 《군문등록(軍門謄錄)》만이라도 먼저 출간해야 한다." 조선사편수회가 위원들에게 나눠 준 목록에 몇 종의 희귀 사료가 수록되어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목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黑板勝美가 출판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 이외에도 상당한 희귀 사료가 포함되어 있었음은 분명하다. 黑板勝美가 위원들에게 출판이 시급한 것을 말하라고 요구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일본 위원인 小田省吾는 조선사편수회가 작성한 목록에 이의를 제기, 선정을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小田은 목록을 열람해보니 '文祿의 役(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관한 것이 많다고 그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다음, 선정 방향을 새로 정해 취사하자고 요청한 것이다. '조선사'를 편찬하기 전부터 사료를 탈취한 일제가 모두 얼마만큼 수집했는지 그 정확한 수자는 알 수 없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는 단지 조선사편찬위원회를 구성했던 대정 12년(1923년)부터 소화12년까지 15년 동안 차입한 사료가 4,950종이라고 밝히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일제가 얼마나 많은 사료를 탈취하여 인멸했는지 그 죄상을 밝히는 것 또한 과제인 것이다. 사료의 인멸은 조선상고사를 없애기 위한 전초작업이었기 때문이다. 6. '영원한 속국(屬國)' 기도, 역사 날조 1922년 설치된 조선사편찬위원회는 조선사편수회(1925년)로 명칭을 바꾸고 여러 차례 모임을 가졌으나 조선인 학자들의 주장은 거의 반영하지 않았다. 조선사편수회의 마지막 회의인 제9회 위원회는 소화10년(1935년) 7월 5일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열렸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今井田 정무총감의 개회인사에 이어 稻葉岩吉 간사의 보고가 뒤따랐다. "단군 기사를 어떻게 취급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이 회의 처음부터 논의가 있어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래서 고려 공민왕 24년 폐왕 원년조의 기사를 검출하여 단군에 관한 고래의 문헌을 채록했다. 이 부분은 이미 책으로 출간되어 배본을 마쳤으므로 여러분도 보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제가 그들이 편찬한 '조선사'에 단군을 수록했다고 생색내고 있는 부분은 백문보의 상소문에 나온다. "문보(文寶) 상소하여 말하되 국가,사직을 세수(世守)하여 문물과 예악이 일어났으나 어찌 뜻하였으리요, 왜구의 난이 크게 일어나고 홍건적이 왕도(王都)를 함락하여 왕가가 남천(南遷)하였으니......대저 천수(天數)에는 순환의 이(理)가 있으매, 7백년으로써 일소원(一小元)하고 3천6백년을 대주원(大周元)으로 한다. 우리나라는 '단군'이래 이미 3천 6백년이 되니 이는 곳 대주원의 운이 아시 돌아오는 때이다." 故 문정창은 '조선사' 3편 7권 말미 백문보의 상소문에 있는 '단군'2자가 '조선사' 35권, 총 2만 4천여쪽에 나오는 단군 기술의 전부라고 지적, 통탄을 금치 못했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조선사'는 총목록, 총색인 각 1권, 본문 35권 총 2만4천1백11쪽, 도판 395매로 1938년 완간됐다. 이 밖에 <<조선사 사료총간>> 20종, <<조선사료 집진(集眞) 3질이 나왔다. 일제의 조선사편찬업무는 예정보다 늦은 소화13년(1938년) 3월에 완료되었다. 사료 수집기간을 제외하고도 만 16년이 걸린 것이다. 이 '사업'을 위해 일제가 쓴 예산은 엄청났다. 초년도(1922년)에는 연간 예산이 1만7천6백40원에 불과했으나 다음해부터 계속 증액되어 약 1백만원이란 거액을 투입하였다. 그러면서도 <<고려사절요>> 24권은 조선총독부의 별도 예산을 받아 출간했다고 하니 일제의 '조선사' 편찬에 대한 집념을 엿볼 수 있다. ◇ 조선사편수회 편찬 '조선사' 내역 구 분 권차 내 용 분량 (쪽) 간행 연도 총목록 1 범례 및 목록 191 1938 1 편 신라 통일 이전 1 조선사료 732 1932 2 일본사료 352 1932 3 중국사료 808 1933 2 편 통일신라 시대 1 신라 문무왕9년(669년)~고려 태조 18년(935년) 457 1932 3 편 고려 시대 1 고려 태조 19년(936년)~선종 1년(1083년) 530 1932 2 선종 2년(1084년)~의종 1년(1146년) 600 1932 3 의종 2년(1147년)~고종 10년(1222년) 581 1933 4 고종 11년(1223년)~충렬왕 5년(1278년) 550 1933 5 충렬왕 6년(1279년)~충혜왕 1년(1330년) 543 1934 6 충혜왕 2년(1331년)~우왕 1년(1374년) 479 1935 7 우왕 2년(1375년)~공양왕 4년(1392년) 1935 4 편 조선 시대 전기 1 조선 태조 1년(1392년)~태종 10년(1410년) 556 1932 2 태종 11년(1411년)~세종 5년(1423년) 516 1933 3 세종 6년(1424년)~세종 24년(1442년) 683 1935 4 세종 25년(1443년)~세조 12년(1466년) 756 1936 5 세조 13년(1467년)~연산군 3년(1497년) 1038 1937 6 연산군 4년(1498년)~중종 10년(1515년) 563 1935 7 중종 11년(1516년)~중종35년(1540년) 642 1936 8 중종 36년(1541년)~선조 4년(1571년) 772 1937 9 선조 5년(1572년)~선조 25년(1592년) 677 1937 10 선조 26년(1593년)~선조 41년(1608년) 1282 1937 5 편 조선 시대 중기 1 광해군 1년(1608년)~인조 3년(1625년) 537 1933 2 인조 4년(1626년)~인조 15년(1637년) 482 1933 3 인조 16년(1638년)~효종 8년(1657년) 584 1934 4 효종 9년(1658년)~현종 14년(1673년) 546 1934 5 현종 15년(1674년)~숙종 15년(1689년) 634 1935 6 숙종 16년(1690년)~숙종 36년(1710년) 810 1936 7 숙종 37년(1711년)~영조 2년(1726년) 852 1936 8 영조 3년(1727년)~영조 25년(1749년) 1034 1936 9 영조 26년(1750년)~영조 51년(1775년) 784 1937 10 영조 52년(1776년)~정조 24년(1800년) 1016 1937 6 편 조선 시대 후기 1 순조 1년(1800년)~순조 20년(1820년) 720 1934 2 순조 21년(1821년)~헌종 6년(1840년) 710 1935 3 헌종 7년(1841년)~철종 14년(1863년) 697 1936 4 고종 1년(1863년)~고종 31년(1894년) 1103 1938 총색인 1 부록 - 색인 894 1938 35편의 '조선사'는 이렇게 하여 출간되었다. 일제가 그들의 통치 목적에 맞춰 '조선사'라는 새 역사책을 쓴 것이다. 일제가 편찬한 '조선사'는 실제의 조선사를 왜곡하여 조선을 일본의 영원한 속국으로 만들려고 역사마저 조작한 증거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광복 후 출판된 권위 있는 역사 사전마저 "'조선사'가 비록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 유화정책으로 된 것이기는 하나, 색인이 없는 사료의 인용을 위해서는 많은 편리를 준다"고 망발을 늘어놓고 있으니 가슴아픈 일이다. 일제가 만들어 놓은 '조선사'가 실제의 역사를 어떻게 분석해 놓았는지는 연구하지 않고 '이용할 가치가 놓다'고 쓰고 있는 사학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7. 비전돼 온 마곡사 古書도 방화 충남 공주군 사곡면 마곡사(麻谷寺) 상원암(上院庵)에는 전래되는 비전(秘傳)의 고서 수백권이 있었다. 일제 치하인 1928년(소화 13년), 20세의 망국 청년이 산천을 주요하다가 이 암자에 들렀다. 그는 이 암자에 비전되어 오던 수백 권의 고서들을 열람하다가 깜짝 놀랐다. 신라의 대문호였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저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청년은 그 내용을 보고 크게 깨달아 귀중한 서적을 어떻게 보관할까 걱정했다. 최치원이 쓴 고서의 사실이 누설되면 일제가 압수할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그는 이 고서 속에 있는 주요 사실을 필사(筆寫)하고 원본은 상원암에 그대로 두었다. 언젠가는 국보가 될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한 그는 깊은 산사에 비장해 두는 것이 그 책의 보존에 오히려 좋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 암자는 알 수 없는 화재로 불타, 비장했던 고서들도 회진(灰塵)되고 말았다. 뒤늦게 상원암의 화재 소식을 들은 그 청년은 또 다른 최치원의 저서가 남아 있을까 하여 전국을 누비면서 수소문했으나 수포였다. 그 청년이 바로 홍종국씨로 그가 젊었을 때 마곡사에서 본 책은 최치원의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홍씨가 환갑을 막 지난 15년 전 자신이 필사했던 <제왕연대력>을 복간하며 그 서문에 고백함으로써 밝혀졌다. 일제는 패망 직전 수집해 두었던 조선의 사서들을 모두 태우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 일부가 한국인들에 의해 구출되었다. 이들을 종합하여 우선 우리나라에 어떤 사서들이 있었으며 일제가 '조선사'를 편찬할 때 어떻게 선별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잃어버린 역사를 이해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 [편저년대상으로 본 단군관계 사서의 계보] ------------------------------------------ ◆ 근거사서 : 47世 단군 또는 그 일부 史實을 인정하고 있는 사서 (소위 도가사서 또는 민족고유사서) 상고 삼국시대 신지비사(神誌秘史) : 단군조, 신지(神誌)찬 해동비록(海東秘錄) : 저자미상 신지비사역술(神誌秘史譯述) : 고구려 대영홍(大英弘)저 --- →A.D.1412년경(조선태종12년경)소각 발해 단기고사(檀奇古史) : A.D. 707~719 대야발(大野勃)찬 1959. 복간본 현존 --- →삼국유사보다 약 560년전 통일신라 제왕년대력(帝王年代歷) : A.D.890년경. 진성여왕20년경 최치원저 1929. 필사본 현존, 홍종국씨 소장 --- →삼국유사보다 약 390년전 고려 조대기(朝代記) : A.D. 926. 발해멸망시 君子 대광현(大光顯) 등 유민들이 고려에 망명귀화할 때 가지고 온 고조선역대실기. --- →삼국유사보다 약 350년전 --- →일제때 압수,소각 표훈천사(表訓天詞), 도증기(道證記), 대변경(大辯經) 동천록(動天錄), 지화록(地華錄), 고조선비기(古朝鮮秘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지공기(誌公記), 삼한습유기(三韓拾遺記) 신선전(神仙傳), 삼성기(三聖記 상편, 안함로저) 삼성기(三聖記 하편, 원동중저) --- →일제때 압수,소각 진역유기(震域遺記) 3권 : 고려말엽 청평도사 이명(李茗) 저술 --- →삼국유사와 거의 같은 시기 단군세기(檀君世紀) A.D. 1283년경 이암(李巖)저 --- →일제때 압수,소각 조선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실사(檀君實史)) : A.D. 1675. 북애자(北崖子)저. 故 양주동(梁柱東) 소장 필사본 현존. 도가사서 중 最高의 것 일제시대 환단고기(桓檀古記) : 1911. 계연수 편찬 신단실기(神壇實記) : 1914. 김교헌 저 동사년표(東史年表) : 1915. 어윤적 찬 조선사략(朝鮮史略) : 1924. 김종한 저 대동사강(大東史綱) : 1928. 김 광 저 조선역사(朝鮮歷史) : 1934. 이창환 저 조선세가보(朝鮮世家譜) : 1938. 윤재구,서계수 공편 광복후 해동춘추(海東春秋) : 1957. 박장현 찬 민족정사(民族正史) : 1968. 윤치도 저 ◆ 비근거사서 : 근거사서 이외의 사서. 소위 불가사서, 어용사서, 유가사서 등 고려 삼국유사(三國遺事) : 1280년경. 일연 저. 1512. 正德本 현존 제왕운기(帝王韻紀) : 1287. 이승휴 찬 조선 동국사략(東國史略) : 1403. 권 근 등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1454. 정인지 응제시주(應制詩註) : 1462. 동국통감(東國通鑑) : 1485. 서거정 등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 1486. 노사신 등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 : 1705. 홍만종 등 동사강목(東史綱目) : 1758경.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 1770. 홍봉한 해동역사(海東繹史) : 1814년경 한치윤 동사보감(東史寶鑑) : 저자미상 동국역대사략(東國歷代史略) : 1899. 대한제국학부 8. 개국 기록한 正史는 모두 인멸 우리 민족의 기원을 밝힌 개국사(開國史)는 어찌하여 한권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인가? 고려시대의 사서가 몇 종류 있다. 하지만 왜 이들 사서는 삼국 이전의 상고사를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고 있을까? 개국 설화를 담은 고문헌마저 5천년 역사를 가졌다는 이 민족은 어찌하여 갖고 있지 못한 것일까? 우리 나라의 역사 서적을 뒤질 때마다 누구나 느끼는 의문일 것이다. 개국설화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바로 인위적으로 없앴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자료가 될 것이다. 민족 기원과 관련되는 사서들을 모조리 탈취, 소각, 인멸했던 일제는 다음과 같은 문헌만을 남겨 둠으로써 오히려 그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고려시대의 사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7언한시로 된 《제왕운기》가 그것이다. 정사(正史)로 분류되는 《삼국사기》와 야사(野史)라고 한때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삼국유사》는 우리나라 상고사에 관해 판이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는 삼국이전의 상고사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삼국유사》는 '단군'을 불교신화로 각색한 것이다. 결국 이들 두 사서는 '단군'을 부정하는데 활용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 주는 결과를 초래한 셈이다. 현재 우리가 거론하는 '단군'은 《삼국유사》를 전거로 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는 昔有桓國<謂帝釋也> 庶子桓雄......이라고 기록, 단군을 제석(帝釋)의 아들로 만들어 놓았다. 《삼국유사》는 단군을 불교신화처럼 각색한 것이다. 일제가 조선의 사료를 불태워 모두 없애려고 했지만 한편에서는 우리의 선대들이 새로운 자료를 찾고 다시 저술하여 광복 후 조선의 정사를 쓰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광복 후에도 이들의 노력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가 편찬한 《조선사》는 사료로 활용하면서도 목숨을 내걸고 이 나라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선대들이 만들어 놓은 사서들은 기피하고 있다. '단군'은 1천 8백 살이나 살았다는 신령이라더라. 고등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지식인들까지도 '단군'을 설화적인 존재로 격하시키는 태도를 알게 모르게 내보이고 있다. 한국의 상고사는 이야기처럼 흘려보내야만 싫증적인 근대 사학을 배운 지식인처럼 오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많은 사서의 저본이 된 《규원사화》를 비롯 《조선세가보》, 《동사연표》 등은 단군조선의 왕대(王代)까지 밝히고 있으니 이는 어인 일일까? 9. 《규원사화》도 탈취,소각 우리나라의 고사서를 분류하면 유가사서, 불가사서, 도가사서로 나눌 수 있다. 이들 사서 가운데 '도가사서'는 민족정기를 키우는데 크게 이바지하였으나 고려 때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이후 유학자들로부터 배척당하기 시작했다. 황당무계한 비사(秘史), 비기(秘記), 참서(讖書)라고 하여 이단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도가사서'들은 고가(古家)나 암혈(岩穴) 등에 묻혀서 그 잔질(殘帙)이 연면히 계승되어 왔다. 적어도 '단군조선사'에 관하여는 '도가사서'만큼 풍부한 기록을 남기는 사서들도 없다. 역사의식에 있어서도 '도가'만큼 고유의 전통문화를 자부하고 존중하며 존화사대주의 사상을 통렬하게 비판한 사가들도 없다. 이들 '도가사서' 중 현존하는 사서 가운데 단군조선사에 관하여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며 가장 방대한 고사기류와 문헌을 바탕으로 하여 비교적 상세하고 합리적으로 저술한 단군실사(檀君實史)가 바로 《규원사화》라고 할 수 있다. 《규원사화》는 지금으로부터 310년 전인 근세조선 제19세 숙종 2년 을묘(단기 4008, AD 1675) 3월 상순에 저술된 사서이다. '단군실사'라고도 하는 이 책의 저자는 불행하게도 이름(실명)을 밝히지 않고 오직 '북애'(北崖老人 또는 北崖仙人, 혹은 北崖子)라는 아호만 서문에 쓰고 있다. 이 《규원사화》는 일제가 소위 '조선사편찬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조선총독부가 이 나라 사서를 탈취, 소각할 때에 거의 전부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양주동이 감추어 두었던 소장본을 일제 치하인 1940년(단기 4273년) 9월 손진태가 극비리에 필사하여 두었다가 광복 후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서울대학교 도서관 및 국립중앙도서관에 각각 1부씩 기증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존하는 것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필사본뿐이다. 《규원사화》는 그 내용이 ① 서문 ② 조판기 ③ 태시기 ④ 단군기 ⑤ 만설 등 5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사화(史話)'는 '유가사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까다로운 범례나 주석 따위는 없으며 문장의 체제도 편년체나 강목체가 아니고 설화체로 되어 있다. 오히려 현대사서에 가까운 자유로운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다. 북애노인이 《규원사화》에 쓴 서문(신학균 역 참조)은 다음과 같다. 북애자는 이미 과거를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했다. 한숨을 쉬며 붓을 던지고 강호에 떠돌아다니기 여러 해가 되었다. 내 발길은 이 나라 구석구석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물에 빠져 죽을까 하는 슬픈 생각도 했다. 때는 양난 (병자호란, 임진왜란)을 겪은 뒤라 삼천리 방방곡곡은 슬픔에 잠겼고 국론은 물끓 듯하며 관리들과 백성들은 울분에 가득 차 있었다. ......<중략>...... 동해에 솟아오르는 해를 바라보니 눈물이 흘렀다. 티끌같은 세상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나서 다시 서쪽으로 떠났다. 구월산에 이르러 당장평에 머물며 삼성사(三聖祠)에서는 감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평양을 거쳐 압록강 하구의 용만에 이르렀다. 통군정에 올라 북쪽 요동반도를 바라보니 나무와 구름이 손짓하듯 부르면 대답할 것 같이 가까이서 머뭇거리고 있다. 한 줄기의 압록강을 넘어서면 벌써 우리 땅이 아니다. 슬프다! 우리 조상이 살던 옛 강토가 남의 손에 들어간 지 얼마요, 이제 그 해독이 날로 심하니 옛날이 그립고 오늘이 슬퍼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중략>...... 내가 보건데 조선은 국사(國史)가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걱정이다. 우리나라의 옛 경사(經史)는 여러번의 병화를 입어 없어지고 흩어졌다. 그런 중 후세에 고루한 이들이 중국의 책에 빠져 주(周)나라를 높이는 사대주의만이 옳다고 했지 먼저 그 근본을 세워 내 나라를 빛낼 줄 몰랐다. 이는 등이나 칡덩굴이 곧게 뻗어갈 줄은 모르고 얽히고 맺히기만 하는 것과 같다. 어찌 천하지 아니한가. ......<중략>...... 내가 일찌기 국사를 써보고자 하는 뜻은 있었지만 본디 그 재주가 없고 또 명산(名山) 석실(石室)에도 진장(珍藏)이 없고, 나 또한 씻은 듯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이니 어쩌랴. 그러나 다행이도 산골짜기에서 청평(淸平)이 저술한 《진역유기》 중 삼국 이전의 고사(故史)를 얻었다. 비록 그것이 간략하고 자세하지는 못하나 항간의 선비들이 구구하게 떠드는데 비하면 오히려 씩씩한 기운이 더 높다. 이에 한사제전(漢史諸傳)에서 글을 빼내 사화를 만들며 자주 밥 맛을 잊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사람이 있어 이 뜻에 동감하랴. 슬프다. 후세에 만일 이 책을 잡고 우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넋이라고 한 없이 기뻐하리라. 숙종 원년 을묘 삼월 상순, 북애노인이 규원초당에서 서문을 쓴다. 북애노인의 《규원사화》서문은 읽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오늘의 우리는 국사(國史)를 가지고 있는가? 북애노인의 시대와 무엇이 다른가? 아! 역시 슬프다. 10. 북애자가 눈물로 쓴 한민족사 북애(北崖)가 눈물로 쓴 한민족의 역사 《규원사화》는 개벽(開闢) 신화로 시작된다. 《규원사화》의 개벽신화인 「조판기」는 지금까지 알려진 다른 설화들과 달리, 천지의 개창과정을 언급한 것이 특이하다. 천지가 개창되어 환웅이 하강할 때까지의 기간은 수십만년으로 되어 있다. 「태시기」는 환웅이 동방을 다스리던 궐년(闕年 : 수만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른 바 신시시대다. 이 시대에 치우씨(蚩尤氏), 고시씨(高矢氏). 신지씨(神誌氏), 주인씨(朱因氏) 등의 씨명(氏名)이 등장한다. 물론 이 시대에는 한자가 없었으므로 일부에서 주장하는 약속의 기호인 고유 문자나 구전되어 온 것을 후대에 한자를 빌어 기록했을 것이다. 신시시대의 영토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서남방, 즉 중국 동북방에는 치우씨의 족이 거주하고 북동지방에는 신지씨, 그리고 동남지방(한반도 북부)에는 고시씨가 거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고시씨의 후예는 후에 계속 한반도의 남쪽으로 뻗어 내려왔다. 치우씨는 계속 서남쪽으로 진출하여 중국 제족을 정복하면서 영토를 확장했다. 신시의 천왕 환웅은 말년에 태백 산정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놓고 신선이 되어 승천하였다고 하며 다음은 단군의 시대로 이어진다. 《규원사화》의 「단군기」는 환웅의 아들 환검(桓儉)이 백산(白山) 단목 아래에서 즉위한 후로부터 마지막 왕인 제47세 고열가(古列加) 단군이 아사달의 당장경(唐莊京)에 들어간 1195년 동안의 기록이다. 때문에 「단군조선 실사(實史)」라고 한다. 이 부분이 바로 《규원사화》의 본론에 해당한다. ◇ 단군조선역대세계(世系) (재위년수) 1세 시조단군 (壬儉 또는 桓儉, 93) 2세 부루(夫婁, 34) 3세 가륵(嘉勒 , 51) 4세 오사구(烏斯丘, 49) 5세 구을(丘乙, 35) 6세 달문(達門, 32) 7세 한율(翰栗, 25) 8세 서한(西翰, 일명 烏斯含, 57) 9세 아술(阿述, 28) 10세 노을(魯乙, 23) 11세 도해(道奚, 36) 12세 아한(阿漢, 27) 13세 흘달(屹達, 43) 14세 고불(古弗, 29) 15세 벌음(伐音, 33) 16세 위나(尉那, 18) 17세 여을(餘乙, 63) 18세 동엄(冬奄, 20) 19세 구모소(구牟蘇, 25) 20세 고홀(固忽, 11) 21세 소태(蘇台, 33) 22세 색불루(索弗婁, 17) 23세 아물(阿勿, 19) 24세 연나(延那, 13) 25세 솔나(率那, 16) 26세 추노(鄒魯, 9) 27세 두밀(豆密, 45) 28세 해모(奚牟, 22) 29세 마휴(摩休, 9) 30세 내휴(奈休, 53) 31세 등올(登올, 6) 32세 추밀(鄒密, 8) 33세 감물(甘勿, 9) 34세 오루문(奧婁門, 20) 35세 사벌(沙伐, 11) 36세 매륵(買勒, 18) 37세 마물(麻勿, 8) 38세 다물(多勿, 19) 39세 두홀(豆忽, 28) 40세 달음(達音, 14) 41세 음차(音次, 19) 42세 을우지(乙于支, 9) 43세 물리(勿理, 15) 44세 구홀(丘忽, 7) 45세 여루(餘婁, 5) 46세 보을(普乙, 11) 47세 고열가(古列加, 20) 여기에 한가지 특기할 사실은 「단군기」에 나오는 47세 단군 1,195년 동안에 조선이 중국의 하(夏), 상(商 ; 殷) 왕조와 전쟁을 한 회수가 대략 8, 9회가 된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제24세 연라(延那) 2년 경인(庚寅 ; 단기 803, BC 1531)에 은(殷)이 조선의 남계를 먼저 침범하다가 격퇴당한 사실이 한번 있었던 것 이외에는 언제나 조선 측에서 하, 상왕조를 먼저 공격했고 대개의 경우 국경을 넘어서 중국 본토에 진격하여 승첩을 거두고 돌아왔다고 한다. 단군조선의 소위 극성(極盛)시대라고 볼 수 있는 제13세 흘달(屹達) 단군 때부터 제15세 벌음(伐音) 단군 때까지 약 100여 년간 (단기 491~595, BC 1843~1739)은 조선의 군대가 하나라의 산서(山西) 지방까지 깊숙히 진격하여 공략하여 마침내 하왕조가 화해를 청해 이를 수락했다는 것이다. 《진역유기》를 바탕으로 당시 조선에 있던 제사서(諸史書)와 중국 고서에서 사실(史實)을 확인하여 단군조선의 왕대와 중국과의 접전 화해 상황까지 밝힌 북애자는 '한나라는 한나라요.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이니 어찌 당당한 진역(震域)을 견주어야만 만족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북애는 이같은 역사가 선가(仙家)에 살아 있다면서 또다른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북애가 중국 사서에서 찾아 고조선과 중국의 전쟁기록을 삽입하여 고조선의 실체를 규명하고 있는 것이다. 300여년 전의 사화이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읽기는 어색한 경우도 없지 않으나 사실(史實)을 대비한 것은 괄목할 사료(史料)의 발굴인 것이다. 11. 역대 임금을 신화적 인물로 날조 북애(北崖)의 《규원사화》는 단군조선 역대 임검들의 치적도 밝히고 있다. 신화 속의 인물처럼 외면당해 온 시조 단군은 인간의 시대를 연 분명한 사람으로 《규원사화》는 기록하고 있다. 비록 시조 단군이 신시천왕(神市天王) 환웅의 아들로 신화적인 인물로 묘사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가 4명의 아들을 둠으로써 「인간군주」였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시조 단군의 등장은 이 땅에서 체제를 갖춘 지배집단의 탄생을 의미한다. 군웅이 할거하던 제족을 통일한 강력한 통치자로 인간시대의 개막을 증거하는 것이다. 시조 단군이 신화적인 가상 인물이 아니라 제족을 거느리고 자손을 낳아 지배체제를 굳혀 나간 실존의 인물이란 것은 그의 개국(開國)의 치적만이 아니라 자손들의 활동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특히 이들 단군조선 시대 역대 임검들의 치적은 중국과 대응관계에서 두드러지고 있으며 이는 중국의 고사들에서도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규원사화》에 나와 있는 단군조선 시대 역대 임검들의 치적을 우선 살피면서 중국의 고사들과 대비하면 놀라운 사실들이 발견될 것이다. 《규원사화》의 「단군기」에 나와 있는 단군조선 역대 임금들의 치적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제2세 단군 부루 임검은 즉위 후 8년 동안 나라 안을 두루 살피고 예(禮)로서 제천(祭天)하고 제후들에게도 옛날과 같이 제사 지내도록 했다. 부루가 임검에 오를 때 우(虞)나라는 남국(藍國)과 인접한 땅을 영토로 삼은 지 수 십년이 되었다. 부루는 제가(諸加)에게 그 땅을 치도록 하여 이를 다 쫓으니 온 세상의 제후들이 와서 임검으로 섬기겠다고 했다. 그 수가 수십이나 되었다. 이에 「어아지악(於阿之樂)」을 지어 사람들과 신령을 기쁘게 하였다. 「어아」라는 것은 기뻐서 하는 말이다. 「선라」를 「앙숙」땅에 봉했다가 수년 후에 도라(道羅)와 동무(東武)를 함께 맡도록 하고 그 공을 표창했다. 이들 나라는 후에 옥저(沃沮), 비류(沸流), 졸본(卒本) 등이 되었다. 부루는 임검이 된 지 34년 만에 사상을 떠났다. 제3세 단군 가륵(嘉勒) 임검은 성덕이 높았다. 「가륵」은 구실씨로 「용가」를 삼아 더욱 융성했다. 때마침 하왕(夏王)이 덕을 잃어 신하 중에 모반하여 왕의 자리를 노리는 자가 있었다. 이에 「식달」에게 「남국」과 「진번」의 백성을 이끌고 이를치게 하니 나라의 위엄은 더욱 빛나게 되었다. 왕위에 올라 51년 동안 성덕을 펴, 백성들이 모두 그에게 감화되었다. 세상을 떠날 때 가륵 임검의 나이는 84세였다. 제4세 단군 오사구(烏斯丘)는 「가륵」의 아들이다. 오사구 임검은 북쪽으로 돌아다니다가 신령한 풀을 얻었고 천하를 21주(州)로 나눴다. 임검 자리에 있을 지 49년 만에 돌아가시니 그의 아들 구을(丘乙)이 제5세 단군이 되었다. 구을 임검이 즉위한 후 하(夏)나라 백성들이 우리나라를 많이 찾아와 암려흘에 살게 했다. 태백산을 막아 일반 백성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왕위에 있은 지 35년 만에 세상을 떠나니 그의 아들 달문(達門)이 제6세 단군이 되었다. 달무 임검은 날 때부터 특이하더니 자라면서 덕성이 높아졌다. 달문 임검은 동해 사람 여로(黎老)를 얻어 「용가」를 삼았다. 임검의 덕은 빛나고 백성들은 악한 것을 몰라 번민을 알지 못했다. 말문 임검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왕이 되어 32년 만에 사상을 떠나니 그의 아들 한률(翰栗)이 제7세 단군이 되었다. 한률 임검은 「오직 죄 지은 자는 범한 대로 돌아가고 도를 닦은 자는 이룬다」고 말하여 더욱 덕으로 다스렸다. 즉위한지 25년 만에 세상을 떠나 그의 아들 서한(西瀚)이 제8세 단군이 되었다. 오사함(烏斯含)이라고도 하는 서한 임검은 조세제도를 만들었다. 백성들로 하여금 생산량의 90분의 1을 바치게 하고 부족한 것은 보충하게 했다. 재위 57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아술(阿述)이 임검이 되니 제9세 단군이다. 어진 아술 임검은 덕이 높았다. 백성 중에 금한 것을 범하는 이가 있다 하니 임검은 「똥구덩이가 비록 더럽기는 하나 그 곳에도 이슬이 내리는 때가 있다」면서 벌하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했다. 이에 죄를 범한 이가 감화를 받아 새 사람이 되었다. 재위 28년 만에 세상을 떠나 그의 아들 노을(魯乙)이 임검이 되었다. 제10세 단군 노을은 울을 만들어 짐승을 기르게 하였다. 재위 2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도해(道奚)가 제11세 단군이 되었다. 임검이 된지 36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도해의 아들 아한(阿漢)이 제 12세 단군이 되어 27년 동안 재위했다. 아한의 아들 흘(屹達)이 제13세 단군 임검이 되었다. 흘달은 무술이 뛰어나고 용기가 있어 백성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좋아했다. 흘달 임검은 해문(奚門)을 얻어 「용가」를 삼았다. 이 때 하(夏)나라의 덕이 시들어가므로 사람을 보내 그 다스림을 보게 하고 무악(舞樂)으로 시험하게 하였다. 임검에 올라 43년 만에 세상을 떠나니 그 아들 고불(古拂)이 단군이 되었다. 제14세 단군 고불 임검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국방에 힘을 기울여 오래도록 태평했다. 제위 29년 만에 사상을 떠났다. 고불의 아들 벌음(伐音)이 제15세 단군 임검이 되었다. 벌음 임검은 훈화(薰華)를 뜰 아래 심어 정자를 만들고 말량(末兩)으로 하여금 「용가」를 삼았다. 임검은 「어린아이도 귀염을 주는 사람에게 돌아가니 백성을 보살피는 도리를 잠시라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같이 덕으로 정치하니 모든 백성이 화답했다. 때마침 「하왕」이 사신을 보내어 도와주기를 바라므로 이에 말량에게 군사를 이끌고 나가 구해 주게 하였다.후에 「하왕」이 다시 군사를 요청했으나 그 무도함을 물리치고 허락하지 않았다. 상(商)나라의 탕왕(湯王)이 어진 정치를 크게 베푸는 것을 보고 벌음 임검은 「덕이 있는 임검이다. 서로 침범함이 좋지 않다」고 해&#49919;. 이에 군사를 거두고 화해했다. 백성들에게 80분의 1의 세금을 바치게 했다. 재위 33년 만에 세상을 떠나 그의 아들 위나(尉那)가 임검이 되었다. 제16세 단군 위나 임검 때는 나라 안이 조용했다. 제위 18년 만에 사상을 떠나니 그의 아들 여을(餘乙)이 제17세 단군이 되었다. 임검이 된지 63년 만에 사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동엄(冬奄)이 제18세 단군이 되었다. 동엄 임검 「웅가」 충달이 「어찌 온 바닷물을 마시고 비로소 짠 것을 깨달을 것인가. 황조(皇祖)가 나라의 터전을 잡은 지 7백년에 이르렀는데 반란의 무리가 방자하게 횡포하여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치니 이는 성도가 쇠한 까닭이요. 임검은 덕을 닦으소서」하고 간하였다. 동엄 임검이 크게 선군의 덕을 닦고 충달에게 서쪽 변두리로 나가 백성들을 어루만지게 했다. 왕위에 오른지 몇 해가 안 되어 머리카락으로 신을 결어서 그 덕을 갚았다. 재위한지 20년 만에 세상을 떠나 그의 아들 구모소(?牟蘇)가 임검이 되었다. 제19세 단군 구모소 임검은 남쪽으로 나가 낙랑홀에 성곽을 수축했다. 즉위한 지 25년 만에 세상을 떠나니 그의 아들 고흘(固忽)이 임검이 되었다. 제20세 단군 고홀 임검은 「속진후」가 돈피로 만든 가죽옷을 바치었으므로 이를 잘 보관해 두고 공이 있는 이들을 기다렸다. 단군조선 47세 임검 중 20세 고홀 임검까지의 치적을 대강 간추린 것이다. 여기서, 특기할 사실은 제2세 단군 부루 임검 때 무악(舞樂)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무악은 태초의 인간 탄생부터 함께 하였을 것이나 부루 임검 때의 무악은 체제를 갖춘 지배집단의 의식(儀式) 무악으로 발전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무악으로 하(夏)나라를 시험했다는 것은 그 당시 중국과 대비하여 단군조선이 상당한 선진 문화를 가졌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또한 조세(組稅)제도가 단군 조선 시대에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제9세 단군 서한 임검 때(단기 320년경, B.C. 2014) 백성들에게 수확물의 90분의 1을 바치게 한 것은 국가의 재정을 충당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 세금은 제15세 단군 벌음 임검 때 80분의 1을 바치도록 세율이 높아진다. 세율을 높인 것은 지배집단의 재정적인 압박에 기인할 수도 있겠으나 그만큼 지배집단으로 강력해진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단군조선 시대 임검들은 제후를 거느린 것으로 되어있다. 이들 봉후국들은 단군조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직접 원조를 하고 중국과의 접전은 이들이 전초를 선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단군 임검을 중심으로 동북아 일대를 지배하는 막강한 협력체제를 구축했었다는 증거자료가 될 것이다. 초기의 단군 조선은 이들 중국 사서에 나오는 하,상나라 등과 접촉했고 군사력이나 문화수준은 중국보다 앞섰다고 「북애」의 《규원사화》는 기록하고 있다. 단군 조선이 하나라의 왕조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군사를 보내 지켜 주기까지 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