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그들은 우리의 사서들을 불태운것뿐 아니라 실제로는 수많은 사서를 일본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황실문고에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복원시켜야 할때입니다 . 조선사편수회는 1927년 6월 조선사편찬을 한다는 구실로 조직을 확대 정비했는데, 이때 해방 이후 강단사학을 대표하게 될 이병도(李丙燾)씨가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의 수사관보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병도씨는 해방 후 사학계의 거두로 우뚝 서게 되어 수많은 제자 양성과 더불어 식민 사학의 전파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해방을 맞이하고 미국의 후원을 업고 귀국한 이승만은 권력을 독차지할 욕심으로 역사청산을 목표로 결성된 반민특위를 반공이념을 수호한다는 명목 하에 강제 해산시키고 친일파를 대거 끌어들여 요직에 앉혔다. 게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안재홍, 정인보 등 민족사학의 거목들이 납북되면서 민족사학은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구 친일사학의 무리들은 이 절호의 기회를 타고 식민사학을 실증사학으로 위장하여 한국 역사학계를 독점하였다 비록 식민 사학자들에게서 배웠지만 일부 뼈대있는 소장 학자들이 그 천편일률적인 식민 사학에 싫증을 느끼고 이에 반기를 들려고 하면 그들은 대스승인 이병도 박사가 그런 짓을 좋아하지 않으니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밥줄이 끊어지는 고통을 당하게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식민 사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 중에서 기골이 있는 사람은 그래도 이에 굴하지 않고 자기의 독특한 민족 사관을 학교에서 가르치다 보면 식민 사학자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화살을 퍼붓는 통에 한국 땅에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가 없어서 미국으로 도피하는 실례도 있었다고 한다. <국사통론>을 쓴 건국대학교의 박형표 교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수십 년에 걸친 압수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몇몇 선각자에 의해 민족사서가 오늘날에 이르러 빛을 보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규원사화, 단군세기외에 환단고기가 오늘날에 출토된 민족사서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다. 수많은 전화나 환란속에서 사라져 간 민족사서의 고갈 속에서 그나마 이것들의 가치는 국보 급이라 아니할 수없다. 환국과 배달국의 존재 등 우리 민족의 고대사에 관한 자료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조선시대 왕조실록 등에 엄연히 존재하며, 일제에 의해 없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일본 황실문고에 대량으로 소장되어 있다. ----------------------------------------------------------------------------- < 98.9.26 한겨례신문 보도> 일본 관헌에게 붙잡혀 일본 황실문고에서 일하다 해방직후에 귀국한 박창화氏 (당시 56세, 이미 사망)는 “일본 황실문고에는 한국의 중요한 고대사 관련 사서들이 모두 있다고 할 만큼의 역사서가 많았는데, 대부분이 단군관련 자료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 또한 박씨는 해방후에 이들 자료를 되찾아야 한다고 수차 당국에 호소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다고 설명한 바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7천년간의 왜곡된 역사를 되찾는 일에 정부와 국민이 힘을 모아야 한다. *일본왕실 문고뿐 아니라 .. 일본 곳곳에 조용히(고의적)으로 잠들고 있을 그들이 훔쳐간 우리의 역사서들.. 사라져간 우리의 수많은 역사서들....어떻게 찾아야 한다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