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하북성이 고구려 주강역 이었는가요 ?”
입니다



(김군)

하북성까지 고구려 주강역이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무리한 주장아닌지요.

확실한 증거들이 필요하다고 보는데요


(답변)

기존의 식민사학자들이 우리의 뇌리에 고정화 시켜놓은
왜곡된 역사인식 때문에 받아 들이기 어렵겠지만
지금부터 설명하는 것을 잘 들어주기 바랍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기록이나 사실들을 제시하겠습니다
기존의 역사인식을 비우고 다시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전부 설명은 곤란하므로 몇가지만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김군)  “네”



(답변)


그러면 설명순서를
첫째 사서에 나오는 대표적 기록 소개와
둘째 유물에 나오는 기록 소개
셋째 천문학으로 연구한 자료소개

순서로 합니다



(1) 첫째 고구려가 하북성 유역을 점유했다는 사서의 기록 소개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 2년(49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원문)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三月 暴風拔樹 夏四月 殞霜雨雹
秋八月 發使賑恤國內饑民


(해 설)

2년(서기 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쳤으나,
요동태수 제융(祭)이 은혜와 신뢰로 대우하였으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3월에 폭풍으로 나무가 뽑혔다.
여름 4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가을 8월에 사신을 보내 나라 안의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자 이기록을 먼저 지도상에서 살펴볼까요




하북성을 통과하여 산서성 태원까지 고구려가 공격을 한 기록입니다
주의할 것은 고대북평은 지금의 부평으로 태행산맥 가까이 있었습니다
상곡은 지금의 탁록지방을 말합니다

이기록은

중국정사인 “후한서”에도 동일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데
“후한서”에는 북평을 “우북평”이라 기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볼수 있는 것은 청나라때 교간된 것만을 볼수 있는데
후대에 “우”자를 첨가 기록하여
고구려 강역을 동쪽으로 이동시키려 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분명히 “북평”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북평 - 태원으로 이어지는 군사진격로도 지도상에서 맞아 떨어지지요


(김군)

그런데 고구려가 강성시 잠시 갔다가 온 것은 아닐까요
계속 점유하고 있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단편적인 예인 것 같습니다


(답변)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다음에 설명하는 추가 내용들을 보고나면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고구려 초기는 물론 말기의 전쟁지명들도 하북성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도 간과 해서는 안됩니다


어쨌던

위 기록을 일부OO들은 “오기”라던지
그당시 고구려 국력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언급자체를 금기시 한다는 것을 추가로 말씀드립니다

전쟁상황임을 감안한다면
위기록은 고구려가 국력이 더 강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며

상식적으로 보아도
한반도나 만주에서 산서성 태원까지 쳐들어 갔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바로 하북성이 고구려 주강역 이었다고 본다면
태행산맥을 기점으로
한족과 고구려가 공방전을 벌이던 전투 접경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알수가 있습니다


(김군)

그다음에 예를 들것은 무엇인가요 ?



(답변)

고구려 유물로 본 고구려 강역입니다


(2) “고구려 유주자사 진의 무덤”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앞의 설명이 사서의 예문이었다면
이것은 “실증주의 사학”이라 주장하는 OO가
제일 좋아하는 실증유물이지요

물론 이 유물도
하북성이, 아니 중국 동해안 전체가 모두 고구려 땅이라
증빙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볼까요


① (발견지역)


1976년도 평안남도 덕흥리에서 발굴된 고구려 고분인데
무덤의 주인공이 고구려에서 벼슬을 지낸
유주자사 진(幽州刺使 鎭)이라는 분입니다

“유주자사”라는 직책은

“유주”라는 것이 북경인근을 말하는데
여기에 위치하면서
고구려에 속한 여러 지방을 총괄하여 다스리던
지금 우리로 말하면 “경기도지사”정도로 비유하면 맞을까요 ?

하여간
중국 동해안 전체를 통치한 고구려 고위관리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분이
중국 북경인근에서 통치를 하다가
고향인 평안도로 돌아와 고향땅에 묻혔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지도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덤발견위치)




1976년 발견되길 망정이지
일제시대때 발견되었으면 아마 어떻게 조작되었을지 모를일이지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물론 OO는 언급을 금기시하고 있습니다

아래에서 추가로 소개하겠지만
북경유역에 땅을 파서 고구려 유물이 나오지 전까지는
이 유물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답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유주위치)





(김군)

그런데 이무덤안에 뭐가 있다는 것인가요 ?


(답변)

자 지금부터 하나하나 알아보겠습니다


② 무덤안의 내용


우선 무덤안 전경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여기에 기가막힌 역사적 실증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무덤안 전경)




중앙에 있는분이 유주자사를 지낸 “진”으로
무덤의 주인공이고

▒ 유주자사 “진”



유주자사 “진”은
331년 태어나 408년 죽을때까지
고구려 4대왕을 모신 고구려의 신하였습니다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331년 ~ 408년 사이에는
중국동해안이 모조리 고구려 땅이었다는 뜻으로
해석을 하면 무슨 무리가 따를까요

기간중 일부를 점유하였던 하여간 중국의 동해안 옥토를
깡그리 지배하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좌측에 서있는 분들이
유주자사 “진” 통제하에 있던 고구려 지방지도자인 13개 태수들입니다

▒ “진” 관할하에 있던 13개 태수




(김군)

그렇다면 13명의 태수는 어디에 위치한 사람인가요 ?


(답변)


자 놀라지 말고 다음 설명을 잘 이해하길 바랍니다


③ 13개 태수의 위치


무덤벽면에 있는 사신들을 보면 우측에 어디에서온 태수라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1) “연군(燕郡) 태수”
(2) “범양(范陽) 내사”
(3) “어양(漁陽) 태수”
(4) “상곡(上谷) 태수”
(5) “광양(廣陽) 태수”
(6) “대군(代郡) 내사”
(7) “북평(北平) 태수”
(8) “요서(遼西) 태수”
(9) “창려(昌黎) 태수”
(10) “요동(遼東) 태수”
(11) “현도(玄도) 태수”
(12) “낙랑(樂浪) 태수”
(13) “............(판독 불능)”


(김군)

도대체 13명의 태수가 있었던 지역은 어디라는 것이지요 ?


(답변)

자 중국 현재지도에 표시하기 전에
어떻게 증빙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일까요 ?

이 지역은 중국지역이므로 당연히 중국고지도를 보고 찾아야
가장 근접한 위치가 되겠지요

자 송나라때 지도인 송본지리지장도 중 일부에서 한번 찾아 볼까요

물론 중국정사 지리지에 나오는 위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 전문적인 부분이라 일일이 언급하기가 어려우므로
나중에 라동현 선생님의 저서부분을 인용하여 알려드리겠습니다

위치가 대동소이합니다

일단 중국 고지도에 나오는 부분만 살펴 볼까요
일단 고지도나 중국 군사지도에 나오는 부분을 개괄적으로 알아봅니다

아래지도를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자 위 지명들을 현재 중국지도상에 나타내볼까요

하북성은 물론 산서성까지 고구려 "유주자사 진"의 통치하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자 아래지도를 보시길 바랍니다






그럼 언제 그랬다는 것인가 ?

유주자사 진이 태어난 331년과 408년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
바로 그때 이지역를 고구려가 통치했었다는 실증유물입니다

왜 이것을 숨기고 교육하지 않는 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민족의 영광을 말하면 죽이려 달려드는(?)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

무역센타에서 고구려 유물전을 할때도 이 무덤 벽에 기록된
글자에 대한 소개는 단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요 ?


(김군)

그렇다면 고구려가 산서성까지 갔다는 말인가요 ?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 요동, 요서, 현도태수의 위치는 어디인지요?


(답변)


지도에도 표시해 놓았듯이
사서에 나오는 9세기이전 요동, 요서의 기준지역은
틀림없이 태원 아래쪽 “요” 지금은 “좌권”으로 변경된 곳입니다





그런데
요동, 요서 태수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므로
“요”를 기점으로 한 지역구분으로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추측해 보지만
사서에 여러 가지 내용들이 산재해 있어

요동, 요서, 현도태수의 위치에 대한 부분은 나중으로 미룹니다

어쨌던 유주자사 진은 북경유역에 있으면서
하북성과 산서성 일대를 통치한 고구려 고위신하로써
고구려땅 일부를 통치하였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진은 331년 ~ 408년 고구려 신하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반드시 비교를 하고 넘어가야될 대목이 있는데
바로 중국 남제서에 나오는 백제 동성왕 시절 7태수에 대한 부분입니다

백제 제 24대 동성왕(東城王)은 479년부터 501년까지 재위에 오르신 분으로
산동성 래주인근에 무덤이 있다고 알려지고 있는 분입니다


고구려 유주자사 진이 사망하고 70년 뒤의 일입니다

아래 지도를 보아주시겠습니까 ?




동성왕 시절 백제는 7지역의 태수를 두고 중국 동해안을 깡그리 지배를 하였습니다

그 7태수 지역이

광양태수
광릉태수
청하태수
성양태수
낙랑태수(북경 아래유역)
대방태수(북경 아래유역)
조선태수(북경지방)

등 입니다


이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고구려와 백제의 강역이 겹칩니다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 영역을 백제가 강성해진 동성왕 시절에
고구려 영역을 침범한 것으로 보아야 되는 것 아닌지요

하북성, 산동성, 절강성 등지는
바로 우리민족의 주강역 이었다는 것을
유물과 정사의 기록이 중복적으로 증빙해 주고 있습니다

절대 허구의 기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김군)

놀라울 따름입니다 ? 혼란스럽기도 하고요
이 유물에 대한 학계 등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


(답변)


아래 신문기사를 읽어 보시겠습니까 ?
판단은 김군이 해주시길 바랍니다




다 읽어 보았지요

상기 기사는 78년 유주자사 진 무덤에 대한 조선일보의 보도내용입니다
이보도는 일본신문을 인용보도 한것인데 국내반응이 참 재미있다는 것을 알것입니다


일본과 국내의 반응이 극과극을 이루는데

먼저 일본의 반응은
-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 영역이 북경까지 였음을 증빙하는 유물이다
- 한국 고구려사는 수정이 불가피 하게 되었다
- 무덤 벽화 인물이 일본 것과 유사하여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라며 충격적인 유물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다음으로 북한 역시

- 고구려의 북경유역 진출을 확인해주는 명문의 유물이다
라는 반응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남한만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즉 서울대 고고학 김원룡이라는 교수 왈

- 일본, 북한의 주장은 비록 명문이 있어도 믿을 수 없다
- 북경에서 고구려 유물이 나와야 믿을 수 있다
- 혹시 귀화한 중국인 무덤일 수도 있다

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김군)

학계의 현실이 어떠한지 이제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가슴이 갑자기 답답해오며 머리가 아파옵니다

마지막으로 천문학적인 분석자료를 마져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


(답변)

그래요
진 무덤 안에는 14행 154자의 묵서명이 있는데 복잡하므로
오재성 선생님의 설명을 곁들여 별도로 설명하기로 하고
진 무덤은 여기까지 합니다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에 의하여
중국, 일본, 우리나라의 사서에 나오는 모든 천문기록이 분석되어
책으로 시중에 소개되고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박 교수 소개나 책소개는 홈페이지에 자세히 올려져 있으니 생략합니다


박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나오는 일식기록을 분석한 결과

고구려는 발해만 북쪽 울란바트로 유역에
백제는 발해만 유역에
신라는 양자강 유역에

위치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자 아래 도표를 보시겠습니까 ?








(김군)

삼국사기가 중국 측의 일식기록을 베껴서 나오는 결과라고 알려지지 않았나요


(답변)

베껴 쓴 것이 아닌 독자 기록임이 이미 증빙되었습니다

그렇게들 알고 있는 경우는 1920년대 일본인 반도충부가 조작한 것으로
해방후 지금까지 우리 역사학자 및 천문학자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이번에 박교수가 바로 잡은 것입니다

한심한 일이지만 지금이라도 밝혀졌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정확성을 입증한 셈이죠

그런데 이정확한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못믿겠다고 하는 학계는
일본인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한 것입니다

그런 항당한 주장들에 대해 “찍소리” 못하게
박교수가 한중일 삼국정사에 나오는
모든 일식기록을 하나하나 모조리 분석하여 “동아시아일식도”라는
책으로 출간 하였습니다

아시아에 처음있는 일이요
우리나라에 최초의 분석책자입니다

우리학자들은 그동안 무얼했느냐 하면 일본놈들의 논문 베껴먹는데 급급하다가
획기적 연구결과가 박교수를 통해 나오니
반론도 제기 못하고 골방에 문잠그고 들어 않아 잠잠해 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합니다

인터넷의 힘으로 잠잠해 지기는커녕
이러다가는 그들의 밥줄이 떨어지게 생겼지요

두 손들고 변화하는 방법이 가장 빠른데 그들은 그것을 모르지요

하여간
아래 글을 읽어 보시면 이해가 갈것입니다


(김군)

네.


(답변)

아래는 박창범 교수의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책자 내용중 일부를 소개하는 것이니
자세히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한/중/일 삼국 일식실현율 비교) 삼국사기가 제일 높다


한중일 삼국은 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많은 일식 관측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관측 기록은 여러 사서에 나타나는 데
그 기록들의 사실성 여부는 기록된 각각의 일식이 실제로 일어났었던 것인지를 알아봄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

2천 년 이상 전부터 일식을 기록해 온 한국과 중국의 일식 기록들의 실현율(實現率)을 비교해 보자.


우리 나라의 경우


신라는 하대(下代)에 서기 787년부터 911년까지 일식 기록이 10개 남아 있는데,
그 중 9개가 실현되어 실현율이 90%이다.

또 상대(上代)인 서기전 54년에서 서기 256년까지 나오는 일식의 실현율은 84%(16/19)이다.

백제와 고구려 일식 실현율은 각각 77%(20/26)와 73%(8/11)이다.

삼국의 일식기록을 다 합치면 평균 80%의 높은 실현율을 보인다
(총 66개 중 53개 실현).


반면에
중국 사서에 실린 일식 기록들의 실현율은 『삼국사기』의 것에 못 미친다.


예를 들면
전한과 후한(前漢·後漢),
동진과 서진(東·西晉),
당(唐)의 일식 기록 적중률은 70%(219/312)에 불과하다
(박창범과 라대일 1994).

삼국의 초기 일식 기록들은 실현율이 더욱 높아 중국 왕조가 전한과 후한이었을 때,

즉 신라 내해 6년(201)까지의 일식 기록과,
백제 초고 47년(212)까지,
그리고 고구려 산상 23년(219)까지의
일식 기록 35개 가운데 31개가 실현되어 일식 실현율이 무려 89%나 된다.

같은 시기에
『한서』와『후한서』에 기록된 일식의 실현율이 약 78%이므로
『삼국사기』의 일식 기록이 11%나 높은 실현율을 갖는다.


따라서
일식 현상에 관한 한 『삼국사기』는 동아시아의 모든 고대 사서 중에 신뢰도가 가장 높음을 알 수 있다
(즉 실제 관측에 근거한 자료이다).


고려 시대의 일식 관련 기록은
서기 1012년에서 1391년까지 『고려사(高麗史)』천문지(天文志)에 134회 나온다.
이 가운데 일식이 실제로 관측되었다는 기록은 116회인데,
이 가운데 85%(99개)가 실현되었다.


이제 일본의 고대 일식 기록의 실현율을 살펴보자.

서기 950년 이전에는 216개의 일식 기록이 있는데,
이 중 35.2%인 76개만이 일본에서 일식을 조금이라도 관측할 수 있는 경우이다.

784년 이전인 야마토(大和)시대와 나라시대에는 실현율이 더욱 낮아
33%(81개 중 27개 실현)에 불과하다.


일본의 초기 국가로 알려진 왜(倭)가 남겼다는 일식 기록은 2/3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식이어서
추측이나 계산에 의한 기사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때 근처인 서기 1550년에서 1650년까지의 기간에도
앞 뒤 시기에 비해 일식 기록은 많이 증가하나 그 실현율은 47%(32/68)로 매우 낮다.

반면에
950년에서 1550년 사이에는 189개 중 137개가 실현되어 실현율이 72.5%로 상대적으로 높다
(박창범 1996).

고대 사서에 기록된 일식이 실현되었는지의 여부는
그 사서의 신뢰도를 가늠하게 해 주는 일차적인 근거가 된다.

예를 들면
일식 기록의 2/3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것들인 야마토 시대와 나라 시대의 일본 사서의 내용은
신뢰하기 매우 어려울 것임을 알 수 있다.



반면에
한중일의 여러 고대 사서들 중에 일식의 실현도가 가장 높은 『삼국사기』의 내용은
그 신뢰에 있어서 타사서와 차별이 있어야 할 것이다.




(답변)

자 이제 결론을 내려봅니다

지금까지 3가지 예를 들어 고구려를 추적해 보았습니다

이미
기원전 2700년대에 구리국 치우천자가 하북성 상곡유역 탁록에서
중국의 시조 헌원과 전쟁을 하였음이 실증되었고
그 분의 무덤이 산동성 동평유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정사에 기록이 있고 유물이 증빙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유역은
치우천자(한웅)의 구려국(배달국)이나
단군왕검의 고조선이나
고구려나

모두 산동성, 하북성을 중심강역으로 존재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한반도에서 잠시진출한 것이 아니라
본토가 그기에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 연구를 하여야 하며

오히려 중국민족이
태행산맥을 넘어 화북평원 옥토를 조금이라도 차지하고자
잠시잠시 침범하였을뿐

화북평원은 동이의 땅이었습니다
간략하나마 이로써 고구려 설명을 마칩니다

(김군)

원서를 보라는 의미와
고지도를 보라는 의미
또 중국 현재지도를 보라는 의미

있는 유물에 대한 재고증과
천문기록
풍습 등을 종합적으로 살피라는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장시간 감사합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참고하시어 좋은 우리역사 결과물이 나올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한가지 강단과 면전에서 싸우지 마시길 바랍니다
진로를 바꿔야 할 지도 모릅니다

기존 공부는 하되 절대 잊지는 마십시요
오래지 않아 답답한 가슴이 뚫리는 계기가 마련될 것입니다


(진무덤 묵서명 자료 해설)

“진” 무덤에 대한 추가자료로
오재성 선생님이 보내주신 글을 올려드립니다

일부 한자가 안보이는 것은 본문 그림자료를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고구려진묘비 덕흥리고분묵서명 : 14행 154자)


아래 내용은 진 무덤 내부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고구려 신하였던 "진"의 무덤 규모가 다른 왕릉보다 크다

그 왕릉들은 단한자의 글도 없다
무엇을 보고 왕의 무덤이라 하는가 ?

"진"유적 만이 고구려 무덤임을 증빙하고 있다
그기에 하북성 산서성이 고구려 땅이라 기록하고 있다

무엇이 진실인가 ?








▒ 한국고대사금석문 72-90쪽 서영대 해설을 참고한 것임


□□郡信都□都鄕中甘里(□□군신도□도향중감리)
□□군 신도현 도향 중감리 사람이며

(주)
라동현 선생님에 의하면
“진”이 고구려 사람이 아니었다면 국명을 기록하였을 것이라며
이 기록은 고구려 영토내 사람임을 말하는 것이라 주장

(신도현)

평안북도 박천(영변)과 하북성 안평으로보는 두가지 설이 있음

釋加文佛弟子□氏鎭仕(석가문불제자□씨진사)
석가문불의 제자인 □□씨 진은


位建威將軍國小大兄左將軍(位建威將軍國小大兄左將軍)
역임한 관직이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주) 국소대형 등은 고구려에만 있는 관직이름이다

龍(양)將軍遼東太守使持節東夷校尉幽州刺史鎭(용(양)장군요동태수사지절동이교위유주자사진)
용양장군요동태수사지절동이교위유주자사였다.

年七十七薨焉永樂十八年(년칠십칠훙언영락십팔년)        
太歲戊申十二月辛酉朔二十五日(태세무신십이월신유삭이십오일)
乙酉成遷移玉柩周公相地(을유성천이옥구주공상지)

진은 77세로 죽어 영락18년
무신년 초하루가 신유일인 12월25일
을유일에 무덤을 완성해서 영구를 옮겼다.

(주) 고구려는 건원칭제하였음을 입증하는 부분이다
광개토대왕의 연호가 “영락”이었음을 증빙하는 유물이다
그런데 왜 삼국사기는 기록하지 않았을까 ?


孔子擇日武王選時歲使一(공자택일무왕선시세사일)
공자가 날을 택했으며 무왕이 시간을 선택하였다.

良葬送之後富及七世子孫(량장송지후부급칠세자손)
番昌仕宦日遷位至侯王(번창사환일천위지후왕)

날짜와 시간의 선택이 한결같이 좋았으므로 장례후 부는 7세에 미쳐
자손은 번창하고 관직도 날마다 올라 위는 후왕에 이르도록 하라

造장萬功日煞牛羊酒肉米粲(조장만공일살우양주육미찬)
不可盡掃旦食鹽시食一(종)記(부가진소단食鹽시식일(종)기)
之後世寓寄無疆(지후세우기무강)
무덤을 만드는데 만명의 공력이 들었고 날마다 소와 양을 잡아서
술과 고기 쌀은 먹지 못할 정도이다
아침식사로 먹을 간장을 한창고분이나 보관해 두었다.
기록해서 후세에 전하며 이 무덤을 방문하는자가 끊어지지 않기를...



(오재성 해설)


신도는 하북성 안평으로 보고 있다.
안평 근처에는 고구려 “동황성”이 있다.

동황성은 고구려사 343년 수도를 옮긴곳이다

이곳은
49년 고구려가 한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평정한 곳의 남쪽이며
고구리와 당이 대결했던 용도, 은산, 고대인성, 신성이 있는 곳 근처이다

무신년은 408년이다.
삼국사기에는 호태왕 17년이라고 하고 있으나 무신년은 408년이다

고분에 기록된 지명은 하북성 근처이다

연(燕), 어양(漁陽), 상곡(上谷), 광령(廣寧), 대군(代郡),
북평(北平), 창려(昌黎), 유주(幽州)가

북평과 태원사이
안평 즉 신도 근처에 있으니
그곳 사람이며

이곳은 고구리 초기부터 말기까지 고구리 강역이니
진은 고구리인이다

수도인 동황성 근처인이라고 하면
현재로 따지자면 수도가 있는 경기도 지사쯤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12월25일 사망하고 2월2일 묘실을 폐쇄하였다.
유일하게 축조 년대를 알 수 있는 기록이다

하북성 동황성이 있는 근처의 신도인이 덕흥리에 묻혔다면
현 평양은 고구리 별도 “한성”으로 보는 것에 타당성은 없을까

수도 동황성과 별도 한성을 왕래 할수 있는 인물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별도 한성은
32년 낙랑국을 합병하고
503년 신라가 독립하므로서 631년 만주 고구리장성과 대치하기 이전 유적인 것이다

진묘비의 큰 의미는
북평과 태원까지 초기부터 말기까지 고구려가 통치한 기록을 보충하여 주는 기록일 것이다  


(오재성)
-우리 역사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