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듣고 알고 있는 내용과 실제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북미대륙을 발견 한사람이 콜롬부스나 아메리고 베스푸치로 알고 있습니까? 그이전 부터 거기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사실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도 보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단군신화에 대하여 단군실화와 단군신화 2가지로 생각 해봅시다. 비판하기 보다는 진실을 알고 서로 생각해 보자는 취지 입니다. 재판에서 원고와 피고가 있습니다. 원고 이야기만 듣고 맞다 하지말고 양쪽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없이 사실만을 검토해 봅시다. 우선 단군신화를 논리적으로 검토해 봅시다. 단군신화에는 서기전(BC) 2333년 평양 , 태백산, 백두산에 신시를 건설하였다는 이야기를 살펴 봅시다. 상기 지역은 고구려 입니다. 고구려 건국 이야기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BC 37년에 주몽(朱蒙)이 이끈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 佳江:渾江) 유역에 건국하였다고 한다. 너무 많은 시간 차이가 나지 않는지요? 우리를 알고자하면 우선 중국에 대해서 알지못하면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현재 중국인의 DNA지도를 보면 북동 중국인과 남서 중국인으로 크게 나뉘어 집니다. 중국인이 중국 자체에서 발생하였다면 이런 지도가 만들어 지지 않습니다. 북동 중국인이 먼저 BC2333년 경에 중국 북부및 동부에 정착 하였습니다. 흔히 이야기하는' 해를 따라 동쪽으로' 울면서 대규모로 걸어서 왔습니다. 세월이 흐른뒤 다른 민족이 사명감을 갖고 뒤따라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두 집단간에 크고 격렬한 다툼이 있었습니다. 약 4천년의 세월이 흘러 두민족의 차지한 땅이 변했을지라도 지금의 중국인의 차지하는 땅은 명확하게 구분 됩니다. 북동중국인의 거주지역을 보면 만리 장성아래에서 시작하여 북동 중국 입니다. 북동중국인의 SYMBOL은 조(새:BIRD)이고 남서 중국인의 SYMBOL은 사(용:DRAGON)입니다. 북동중국인을 조족(鳥族)이라 하고 남서 중국인을 사족(蛇族)이라고 부릅시다. 조족은 지방분권 족장 체체 였고 사족은 중앙 집권 왕중심 체제였습니다. 조족의 특징은 제사와 문자 문화 온화함 이었습니다. 사족이 조족을 이긴것은 주나라의 은나라 점령이고 사족이 조족을 또다시 크게 이긴것은 진나라 진시황때 입니다. 조족을 많이 죽이고 포로 몇십만을 붙잡아 조족땅을 관통하는 만리장성(대규모 공사)을 시작하여 가정을 이루지 못하게하고 죽여 조족 인구수를 급감 시켰습니다. 흔히 한자라고 하는 문자에 대하여 살펴 봅시다. 중국 기록을 보면 하,은,주, 춘추, 진, 한, 삼국, 진, 남북조, 수, 당, 송 순서 입니다. 춘추전국시대에 기록된 사서 삼경, 손자 병법등에 사용된 문자는 무엇일까요? 한자(漢字)?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한은 진보다도 뒤에 입니다. 진시왕이 책을 불사르고 죽인 일을 분서 갱유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때 문자체계는 이미 완성되었고 잘 사용 되지 않는 희귀한 글자가 한나라 때 일부 포함 됩니다. 모든 조족 기록을 불사르고 자기 마음대로 역사를 만들어 교육 시킨 것 입니다, 갑골 문자가 발견되는 지역은 조족 거주지역에서 입니다. 따라서 한자(漢字)보다 조자(造字)라고 부르는것이 타당 합니다. 조물주를 따르면서 조(새:BIRD)를 조물주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사족의 수도는 당나라 때까지 서안 즉 서쪽 중국에 있었습니다. 사족 입장에서 동쪽 나라를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면 동쪽 조족 문화가 서쪽 사족 문화에 비해 월등한 것 입니다. 동방예의지국이 쓰인 것은 기원전 오래 전입니다. 동방예의지국이 널리 쓰여진 때는 한반도에는 기록에 겨우 나라가 등장 합니다 동방예의지국은 한반도와 직접 상관 없습니다. 중국조족 DNA와 한반도인의 DNA의 차이가 없습니다. DNA는 지금도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 됩니다. 진시왕이 급사하자 사족이 한나라를 세워 진의 정신을 계승 하였습니다. 계속 조족에게 압박을 가하던 사족은 당나라 때에 나당 연합하여 완전히 무릎을 꿇리고 국가를 해체 하였습니다. 드디어 사족 사명을 달성한 사족은 고구려인(가오리:조족)을 납작한 물고기 의미의 가오리라 부르고 신라도 그렇게 부른 것 입니다. 납작한 물고기에 "가오리"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 입니다. 납짝하게 밟아 눌러 이겼다는 의미 이지요. 지금도 어려운 일을 역전 시키면 "아싸 가오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역사란 무었일까요? HISTORY를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국 캠브리지 졸업생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 입니다. HISTORY: HIS + STORY HE가 조물주를 의미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역사는 사(뱀,용)의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SNAKE STORY, DRAGON STORY HISTORY를 직역하면 역조가 되겠지요? 중국의 역사는 진시왕에서 시작되었고 한반도에서 역사는 김유신장군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군실화가 아싸 가오리 차원에서 쓰여진 것이 단군신화 입니다. 단군은 제사와 정치를 대표합니다. 아무나 될 수 없는 것이지요. 왜 단군신화에 단군을 서자로 기술하였을까요? 정통성을 부인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면 장자는 누구일까요? 사족을 보내어 조족을 진멸 하라고 지시한 사람을 지칭한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가오리가 얼마뒤 정신을 차리고 전열을 정비 하여 돌궐이란 나라를 세웠습니다. 대오 각성하고 기병을 조직하여 친 나라가 어디일까요? 보급품 없이 목숨걸고 기병만으로 바로 치고들어가 무너뜨려 건설한 나라가 지금의 투르크 입니다. 잃었던 땅을 차지하고 아라랏(아리랑 아라리 어원?)산을 점령하였습니다. 약 천년 세월뒤 한국전이 발발하자 대규모로 와서 지원하였고 죽으면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터키는 투르크의 영어식 발음 입니다. 단군신화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씌여졌습니다. 역조에는 용이 없습니다. 훗날 아싸 가오리 사관으로 단군 신화를 쓸때 명백한 악의로 씌여 진것입니다. 용에게 강가에서 강간당하여 난 후손이 제사장이 된다? 그런자가 제사를 지낸다? 웃기는 일이지요. 진시왕이 책을 불사르고 학자를 죽이고 할 때 남은 것이 있습니다. 조자(造字)입니다. 조자(造字)를 살펴 봅시다. 선(船)이란 글자가 초기부터 나옵니다. 조금 과장하면 항공모함 크기의 배입니다. 3~4천년전에 어떻게 이런 개념이 대륙한가운데 사는 조족에게 있었을까요? 이미 배만든는 기술이 있었고 물건이 있었습니다. 대단한 문화와 수준 입니다. 피라미드 건설 시기 보다 조금 앞선 시기입니다. 탑(塔)이란 글자를 살펴 봅시다 탑에는 금탑 은탑 동탑 철탑 석탑 목탑 등이 있습니다. 왜? 수(水)탑은 없을까요? 사람들이 사용 하지 않을 까요? 존재하지 않기 때문 입니다. 토(土)탑을 들어 보셨나요? 있다면 장마때 다 무너지겠지요? 탑을 살펴보면 탑塔 토(土) 풀초(草)를 합(合)하여 만든것임을 알 수있습니다. 북동중국에서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어디일까요? 중동입니다. 조족은 탑(塔)을 살륙의 상징으로 알고 몸서리 쳤습니다. 그래서 조족은 불교(용)가 들어오기전에는 탑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천(遷)이란 글자를 살펴 봅시다 대규모로 이사할 때 사용 합니다. 서쪽에서( 西) 커다란 무리가 걸어서 왔다는 의미 입니다. 세계 DNA 지도가 이를 뒷받침 합니다. 제사(祭사)이란 글자를 살펴 봅시다 짐승 肉을 손으로 잡아 신께 바친다는 내용 입니다. 제기 그릇 ( 맹孟에서 子가 빠진 글 입니다: 잘 쓰이지 않는 글자 입니다) 에 무엇을 담았는데 그것이 피(혈血) 입니다. 연결하면 제사는 짐승(진짜는 사람 제주 자신)을 잡아 피를 조물주에게 바친 것 입니다. 조족 기록이 불살라졌을 지라도 일부 사족이 보관한 책이 있습니다. 피는 무엇일까요? 생명 입니다. 목숨을 걸고 잘못을 비는 것이지요 무엇을 잘못했을까요? 제사의 근본은 죄와 그것에 대한 해결책인 피(혈血) 입니다. 시(始)이란 글자를 살펴 봅시다 여자(女)가 몰래 먹었다(口) 이야기 조합 입니다. 뭘? 왜? 먹었을까요? 여자 혼자 먹고 끝난 것이 아니라 시작 입니다. 그래서 목숨 걸고 빈 것 입니다. 조(造)이란 글자를 살펴 봅시다 흙(土)으로 사람(口)을 만들어 그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니 걸어 다녔다 조물주는 물건만 만든 것이 아니고 사람을 만들었다는 뜻 입니다. 조족은 쉽게 조물주란 말을 하지만 사(한漢)족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겠지요? (田)이란 글자를 살펴 봅시다 네모 반듯한 정리된 농지로 보입니까? 초기 글은 네모가 아니라 원에 둘러 싸여 있습니다. 백두산 천지 처럼 자체적으로 샘이 솟아나서 4 강(江)을 이루는 지역을 FIELD (장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백두산 주위? 너무 척박합니다. 그러면 어디일까요? …………. 춘추전국시대까지는 조족의 역할이 컸으나 진부터는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춘추 전국 시대의 공자는 스스로 조족이라고 인정하나 사족에게도 제사권을 넘겨주고 사족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여 사족 시대를 이끈 주역 입니다. 진시왕이 완전한 사족 시대를 이끌도록 정신적인 토대를 마련 해준 것으로 생각 합니다. 태백산에 신시(神市)를 건설하였다. 이것에 대하여 생각 해봅시다. 첫 인류의 시작이 산에서 시작된다. 산에 첫 도시를 건설한다. 왜? 산에서 출발하였을까요? 바다가, 강가나 평야가 아니고 말입니다. 그 산(山) 이름이 태백이다? 태백산은 어디에 있는 산일까요? 조족이 중동에서 쫒겨나 걸어서 동쪽으로 왔다면 그 산은 중동에 있는 산 입니다. 초기에는 산정상이 눈으로 덮이지 않았지만 추방당할 즘에는 산정상은 일년내 내 눈에 덮여 있었습니다. 머리가(산정상) 희다 하여 백두산이라고도 불리게 된 것입니다. 태백도 백의 의미가 눈이라고 생각 됩니다. 훗날 가오리들이 이산을 되찾은 것을 보면 아라랏 산으로 판단 됩니다. 지금도 산정상에는 일년 내내 눈으로 덮여져 있습니다. 지구 온난화가 가속 되어 눈이 녹으면 거대한 그 무엇이 나타나겠지요. 왜? 중동에서 도망치게 되고 후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계속 뒤따라 다녔을까요? 산에 정착하고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자 인구가 늘어나게 되어 산으로는 감당 할 수 없게 되어 평야지대로 바닷가로 인구 이동이 있게 됩니다. 산정상 부근에 거대한 신전에 상응하는 무엇이 있었습니다. 제사를 맡은 조족은 그곳을 떠날 수 없었고 다른 무리는 차츰 타 지역으로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산을 냉철하게 경제적 측면(농사)에서만 바라보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조족 인구가 늘어나고 먹고 살기에도 급급하게 된 것 입니다. 제사장 권한을 이용하여 공물을 받기 시작 한 것입니다. 산 아래로 부터 식량 및 필요 물자 공급이 시작 된 것 입니다. 처음에는 자원하여 내던 공물도 다른 무리에게는 부담이 되기 시작 한 것입니다. 나중에는 잔인하게 착취하기에 이릅니다. 제사를 맡은 자의 인구 비율이 5%정도 이면 별 문제 없이 넘어 갈 수 있겠지만 20~40%에 이르면 부담하기에 벅차고 그 정도를 넘어 서게 됩니다. 가을이 되면 조족을 제외한 무리는 근심에 싸이게 됩니다. 조자(造字) 수(愁)의 의미를 살펴 봅시다. 가을(추秋)의 마음(심心) 입니다. 가을이 되면 조족은 다른 무리의 근심 덩어리 였습니다. 겨울이 닥치면 먹고 살 것이 없어 근심에 싸인다? 후에 조족이 북중국에 거주 할 때 사족이 기록한 것을 보면 가을에 조물주에게 추수 감사제를 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혀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없습니다. 계속 착취가 계속 되자 반감이 쌓여가게 됩니다. "공양외농" 초기에는 공양만 있었고 후에 외농까지 나타 나게 됩니다. 조족의 최대 약점이자 최대 악습 입니다. 이로 인해 목숨을 잃고 기록에서 까지 사라 지게 된 것 입니다. "공양"이란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말이지요 이해를 위해 정치가를 살펴 봅시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해당되지 않아 이해가 어렵겠지만 다른 나라 후진국을 보면 조족 추방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가는 좋은 사람만의 모임 입니다만 후진국 다른 나라에는 정치가가 된다는 말은 공짜를 의미하지요. 평생 직장이나 사업 없이 돈 벌어 본 일도 없이 엄청난 축재를 하여 발각되고 쿠데타가 일어나 또 다른 나라로 도망가서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족이 중동에서 쫒겨난 이유가 똑 같습니다. 중동에 쿠데타가 일어나 죽임을 당하고 대규모 공사판에 끌려가 가정을 꾸리지 못함으로 멸족에 이르게 됩니다. 이때 중동에 크고도 큰 혼란이 오게 됩니다. 이때 중동에서 조족이 도망친 것 입니다.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동쪽으로 걸어 오면서 들에 자생한 마늘 쑥 등을 닥치는 대로 먹으면서 동쪽으로 이동하게 된 것 입니다. 그 후 쿠데타 주역 또는 그 후손이 조족의 정착 소식을 듣게 됩니다. 조족과 외모가 흡사하고 용맹한 민족을 동쪽으로 보내 죽여 버리라고 지시 한 것 입니다. 지금도 악랄하고 탐욕스러운 정치가를 외국까지 좆아가서 혼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족은 조족을 죽이고 완전히 없애는 사명을 부여 받았습니다. 이 사실은 사족은 알고 조족은 몰랐기 때문에 (어렴풋이 알았으나 확신은 없었겠지요) 조족에게는 일방적으로 불리한 싸움 이었습니다. 조족이 동쪽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자 그 이념을 홍익인간으로 내세웠답니다. 어느 단체 슬로건이 '지각을 하지 말자' 이면 그 단체는 지각이 없는 단체가 아니라 지각이 많아 큰 문제가 되는 단체로도 볼 수 있습니다. 홍익인간을 이념으로 내 세운 것으로 보아 잘못을 크게 뉘우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족은 정의의 심판이란 이름으로 조족 멸족 작업에 들어가게 됩니다. 사족은 초기부터 왕 중심 체제가 된 것은 쿠데타 집권 세력으로 부터 대표가 권한을 위임 받았기 때문에 가능 했습니다. 초기에는 조족 사족 인구 비에서는 조족이 월등 했지만 진시왕이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쿠데타 집권층은 그 권위를 위해 집권 이론이 필요 했습니다 조족의 권위를 대항하여 정통성을 갖기 위해 사실은 아니지만 그럴듯한 이론 즉 진리를 내 세웠습니다. 진리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 처럼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옷의 의미를 부여 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쿠데타 집권층의 SYMBOL도 사족의 SYMBOL도 용(龍) 입니다. 진리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물어 보면 어물어물 대답 못 합니다. 진리는 용어(龍語) 입니다. 기독교를 비난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 I AM THE TRUTH' I AM THE LIFE'를 이상하게 번역하여 '나는 진리이다 나는 생명이다'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말 인지요? 정확하게 번역하면 '나는 참이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나 이외에는 모두 거짓이고 사망이다 예수가 하는 말만 참이고 그이 외 말은 모두 거짓(진리)라는 뜻입니다. 확대하면 예수는 조물주 이고 절대자다 그런 의미 입니다. THE는 배타적인 의미 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사람 들이 가만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매질하고 침 뱉고 십자가에 매단 것입니다. 조물주의 피로서 제사를 지낸 것 입니다. 참이거나 거짓이거나 대단한 일입니다. 진리는 용어(龍語) 입니다. 성경 즉 조물주에 대한 이야기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단어 입니다. 진리 수호를 위해 참( 진실)을 뭉개기 시작 한 것이지요 "아싸 가오리"의미가 고구려 놈들을 밟아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의미와 확대하면 조물주를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의미 입니다. 우리나라를 보면 재미 있습니다. 학교에선 역사를 배워 머리는 역사화 되어 있으나 마음 한구석에는 산을 그리워하는 것을 보면 가슴과 DNA는 조족 입니다. 단군의 자손이라고도 하면서 왜? 역사를 고집 하는가요? 고구려를 우리의 일부로 보고자 하면 아싸 가오리라는 말을 그치고 단군신화도 역사적인 측면 즉 신라 등장이후에 나타나는 용어(龍語)는 모두 지우고 재 조명해야 할 것 입니다. 신기한 것이 또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조선 시대까지 왕을 용이라 하였습니다. 용안,용포…… 그 상징이 용 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대통령의 상징은 새 (봉황)입니다. 왜 나약한 새를 상징으로 바꾸었을까요? 누가? 왜? 언제 그런 생각 하였을까요?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왜?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을 애국가에 왜 넣었을까요? 없는 것을 만들어 가는 것은 조족 이외 민족의 특징이고 있는 것을 잃어 가는 것이 조족의 특징 입니다. 친일파가 아닌 자 즉 역사 교육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자 독립 운동을 위해 만주 지역을 떠돌던 자들이 조족 정서를 그대로 담아 놨기 때문에 역사를 배운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봉황과 애국가가 왕 짜증나는 일이겠지요? 애국가를 바꾸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인지요? 역사를 배운 자들 입니다. 역사는 그 뿌리가 없기에 그것을 따르는 자가 기준을 삼고자 외국 (사상,물건)은 무조건좋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외농" 즉 "외제라면 농약도 마신다" 라고 말합니다. 조족이 살길은 공양외농에서 철저하게 벗어 나는 길만이 사는 길이다. 공양 반대로 무슨 일이든 대가를 반드시 지불하고 역사대신 역조 교육만이 살길 입니다. 대략 연대가 다음과 같습니다. 은 : BC 1600~1046 주 : BC1046~722 춘추: BC 722~BC221 인용한 글 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공자님 또한 동이족입니다. 중국의 사서중에 가장 유명하고 정통의 사서로 인정받는 책이 바로 사마천이란 사람이 쓴 "사기"라는 역사책입니다. 그 유명한 사마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나라는 동이족의 나라이고, 주나라는 華족(중국 漢족)의 나라다 그리고 공자님은 공자세가, 예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은나라의 후손이다 맹자에도 분명히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요. 그렇다면 공자님은 바로 동이족이라는 얘기입니다.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세워졌습니다.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세워진 뒤, 은나라의 공자가문은 주나라에서 7대동안 벼슬을 하지 않았답니다. 절개를 지킨 셈이지요. 7대가 지난 후부터 주나라 관직의 벼슬길에 나오게 되었는데, 그 10대손이 공자님입니다.*** 갑자기 웬 공자 이야기이냐? 반문 할지 모르겠지만 동양 기록의 전환점에 선 가장 중요한 인물입니다. 공자를 통해 진실을 파악 해보자 은은 동이족 즉 조족이고 주는 화족 즉 사족이다. 중국인의 DNA지도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주는 서쪽 변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하였다고 전한다. "공자가문에서 7대동안 벼슬을 하지 않았다." 굉장한 일 입니다. 사족에 대한 조족의 거부가 심하였다는 말 입니다. 즉 공자 가문은 조족으로 높은 지위에 있었다고 볼 수있고 조족의 정신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조족이 도망하여 중국땅에 정착한것이 확실한것은 은나라때 부터 입니다. 조족을 추격한 사족은 학자도 아니도 용맹한 무인들 입니다. 드디어 소수의 사족이 집권층이 된 것이지요. 서쪽 쿠데타 집권층으로 부터 전술과 진보된 무기 공급이 당나라 때까지 계속 됩니다. 그러다가 가오리의 공격을 받고 쿠데타 집권 세력이 망한 것 입니다. 가오리들이 정확하게 적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용한 글입니다. ***공자는 이름이 丘요, 字는 仲尼이니, 그 先代는 宋나라 사람이다. 아버지는 叔梁紇이요, 어머니는 顔氏이니, 노나라 양왕 22년(B.C 551) 경술년 11월 경자일에 공자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에 힘썼고 노나라의 창시자로 주왕조(周王朝) 건국의 공신이기도 했던 주공(周公)을 흠모하여그 전통적 문화습득에 노력했으며, 수양을 쌓아 점차 유명해졌습니다.*** 공자의 부는 조족 이었고 모는 사족 입니다. 혈통상으로는 혼혈 입니다. 즉 공자 가문 8대부터 사족을 섬기기 시작 했고 9대에는 사족과 결혼 하였고 10대 공자가 태어 난 것 입니다.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아 사족을 따르고 있습니다. 은나라를 점령한 주나라의 건국 공신인 주공을 흠모 하였습니다. 공자의 일평생은 사족을 위해 바쳐졌습니다. 혈통상 반(1/2)이 조족이라고 동이족 운운하는 것은 크게 잘못 됐습니다. 공자의 활동과 저서는 전적으로 사족을 위한 것입니다. 공자께서 모아 기록한 제문선에 대하여 살펴 봅시다. 공자보다 앞선 시대의 사람들의 제문을 살펴 봅시다. 제문에 5행성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아버지여 우리는 어떻게 제사를 지내는지 알지 못하나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내니 받아 주시고 우리를 옛날과 같이 잘 살게해주십시오 이런 내용 입니다. 조물주는 아버지가 되고 제주는 천자가 되는 것 입니다. 제주는 다음 세대에도 천자가 되는 것 입니다. 조물주에 대하여 피로 제사를 지낸 것이 명백하다.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자격이 사족에게는 없었습니다. 공자 이후로 조상에 대한 제사로 바뀌면서 사족도 제사를 지낼 수 있게되어 조물주 대신에 조상으로 피 대신에 일반 음식으로 대체 된 것 입니다. 조족 제사를 대항 할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 입니다. 사족(추격 병)은 용감 했지만 머리 속 정리는 되어 있지 않아 공자께서 그 이론 을 제공 하였습니다. 조족은 제사 지낼 때는 우두머리 즉 제사장족이 되었습니다. 제정일치 시대는 천자가 제사와 정치를 겸하게 된 것 입니다. 제사에는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조물주 , 죄, 피, 용서, 회복 입니다. 중동 쿠데타 집권 세력은 이것에 흠집 내기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피는 가축을 필요로 하고 도살이 필요 합니다. 사족은 제사장을 백정이라고 부르고 천시하고 피를 몸에 바르는 것을 혐오 하였습니다. 가축 즉 짐승을 키우는 것조차 천시 하였습니다. 역조에서는 조족은 천자(단군)가 되지만 역사에서는 조족은 백정이 되는 것 입니다. 제문에 5행성을 만드시고 운행 하시는 아버지여 옛날 무덤에 왜? 별자리가 나오는 지 아십니니까? 별자리는 아주 옛날에는 조물주를 알기 위한 교안 이었습니다. 아주 옛날에 대하여 같이 생각 해봅시다. BC2333에 백두산에 신시를 건설하였다고 봅시다. 조족에게는 그 권위를 상징하는 거대한 무엇이 있었고 그후 중동 쿠데타 집권층은 집권후 권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뭔가를 보여 줘야 했습니다. 쿠데타 집권층이 만든 것이 피라미드 입니다 지금 중동 사람중 투르크를 제외한 대부분은 중동 쿠데타 집권 후손으로 보시면 크게 틀린 것이 없습니다. 인용한 글 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세계 최대의 건조물인 피라미드는 고 왕국의 전성기인 기원전 2700년 경에 만들어 졌다. 피라미드에는 상형 문자로 이일에 동원된 일꾼들이 먹어치운 무, 양파, 마늘의 양이 기록되어 있다. 피라미드의 가장 경이로운 점은 아마도 그 거대한 구조물의 방향일 것이다. 각 능선은 거의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그 각도의 오차는 진북(眞北)에서 5분 밖에 벗어나 있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도 미미한 것이어서, 우연의 배열의 결과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또한 현대 20세기의 건축물로도 따라갈 수 없는 정확성은 도저히 인간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이다. 105 m 높이의 '상승통로'는 완벽한 배열에서 1 cm 도 벗어나지 않았으며, 이 피라미드가 건조될 당시 천구(天球)의 북극에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용 자리의 알파 별을 지표로 삼아 이 통로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런 놀라운 배열로 미루어 보아, 피라미드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해시계이고, 달력이고, 동시에 천문대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 기원전 2700년 경에 만들어 졌다. 조족 시작이 기원전 2333년 이라면 기원전2700은 약간 과장(6~700년) 되었다고 봅니다. 그런 구조물이 어떻게 그시대에 지어졌을까요? 그리고 상형 문자는 무었인가? 유치한 문자와 맞지 않습니다. 갑자기 그런 건축이 가능 했을까요? 그많은 돌은 어떻게 가공하고 정확하게 건축 했을까요? 타제석기시대 마제석기시대 청동기시대 그런 이론은 자리 잡기 어려운 대목 입니다. 용 자리는 그들의 SYMBOL이 용이었기 때문 입니다. 놀랍게도 그당시 우주의 중심은 용자리의 별이었습니다. 중심이 조물주가 아니라 용이 었으나 진북에서 이제는 벗어나((진북에서 5분 벗어남: 천지 개벽이상의 엄청난 일 입니다) 조물주로 상징 되는 별자리로 중심이 옮겨 졌습니다. ......... 기원전 2333년에는 믿기 어렵겠지만 고도의 문명 사회입니다. 카다란 배 (선船)이란 글자가 나오고 그 바로 뒤에 피라미드가 등장 합니다. 불가사의가 아닙니다. 배(선船)이야기는 조족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 입니다. 타민족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면 조족을 모든 민족의 우두머리로 인정 해야 하니까요. 곰이나 호랑이 이야기 단군신화를 들으면 원시 시대로 착각하기에 좋을만 합니다. 그러면 고도의 문명 사회라면 글자는 어찌하여 원시 수준 일까요? 너무나 엄청난 일이라 여기서 접어 둡시다. 그러나 글자가 먼저일까요? 실물이 먼저 일까요? 그리고 별자리 경우 우주에서 일정한 궤도를 갖고 도는 별이 어찌 지구에 볼때 계절마다 무리지어 나타나는 걸까요? 우연의 일치다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고대 별자리는 모든 민족에게 거의 동일하나 약간의 해석차이가 있습니다. 인도를 살펴 보면 우리에 대하여 보다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인도에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던 중 어느 날 브라만이라는 전혀 다른 민족이 들어와 제사를 맡은 상류층이 된 것 입니다. 제사를 맡은 브라만과 인도 상류층은 혈통상 아리안계 입니다. 조족이 아닌 자가 제사를 지낸다? 힌두교를 살펴 보면 창조신과 파괴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브라만의 신은 창조신 입니다. 먼저 살고 있던 사람들은 파괴신을 섬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창조신은 조물주로 볼 수 있겠지요. 이마에 바르는 붉은 것의 의미를 브라만에게 직접 물어 본 일이 있습니다. 신에게 나아 갈 때 정화 후 나아가기 위한 것이라 합니다. 죄를 사한다는 의식 입니다. 붉은 것을 이마에 바르는 것은 초기에 짐승 피였기 때문이라고 생각 합니다. 후에 피에서 붉은 물감으로 바뀐 것입니다. 제사의 필수 요소인 조물주, 죄, 피,죄 사함,축복(번영) 모두 있었습니다. 조족이 중동에서 실각하고 그 뒤에 되어진 일들을 유심히 지켜본 그들은 철저하게 분석하여 실수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처음 그들이 가졌던 종교는 피지배층 종교와 혼합되어져 많이 바뀌었으나 지배 형태는 수천 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조족에게 어깨 너머로 배웠으나 조족은 실각하고 그들은 지금까지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불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들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아! 불교? 힌두교의 한 종파 입니다. 힌두신의 윤회로 석가모니가 되었다는 간단한 대답입니다. 불교 경전을 읽어 보면 브라만 계층을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는다고 생각 듭니다.. 조족의 제사 힌두교 불교 순서 입니다. 삼국시대에 불교를 받아들여 히말리아산을 성산으로 성지 순례를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족의 DNA지도를 보면 히말리아산과는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해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 할 때 이동 경로와도 상관 없습니다. 백두산 태백산 장백산은 조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나 히말리아산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사족을 상징하는 산으로 보시면 됩니다. 공자의 아버지는 장백산족이며 어머니는 곤륜산족이라고도 합니다. 히말리아 산정상이 일년내 내 눈으로 덮여져 있다 하여 조족의 성산이 된다? DNA지도와 정면으로 반대되는 이야기 입니다. 인도 브라만 을 관찰하면 조족이 중동에서 행했던 일들을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 합니다. 어떻게 실각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지배를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일본에 대하여 알아 봅시다. 일본인의 DNA지도는 2 민족으로 크게 나뉘어 집니다. 일본에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던 중 조족들이 일본에 진출하여 제사장 및 지배 계층이 된 것 입니다. 상류층 즉 귀족의 DNA는 조족 입니다. 일본과 다툴 때 역사 운운하면 100% 패합니다. 일본인이 만든 역사를 배웠으므로 그들은 그것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임을 알고 있습니다. 만든 사람과 암기한 사람이 다툰다면 암기한 사람이 백전 백패 입니다. 역조로 돌아가면 쉽게 아주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 조족들의 발자취를 살펴 보면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습니다. DNA지도를 내밀고 설명해 보라고 하면 끝입니다. 일본 조족을 일반 일본인과 격리하여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일본 지배층이 남 중국에서 왔다고 하는데 DNA지도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일본 지배층은 자기자신에 대하여 아주 잘 압니다. 일본 조족을 살펴보면 재미있습니다. 그들에게 "공양"의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일본인을 경제동물이라고 합니다. 바꿔 말하면 남에게 손을 벌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남에게 구걸하는 것을 아주 큰 수치로 여깁니다. 남에게 폐 끼치는 행위를 아주 싫어 합니다. 일본 조족을 보면 공양외농 중에서 공양은 없는 것 같습니다. "외농"도 내부로는 굉장한 자부심을 가고 있는 것 같으나 아직 해결 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조족으로선 반 이상 성공한 것으로 생각 됩니다. 일본의 번영이 일시적인 것인지 계속 될지 모르지만 번영의 초석이 공양문제 해결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단군 신화는 조물주에 대한 악의(惡意)와 조족에 대한 저주로 시작되는데 비해 일본 신화 첫머리에 조물주가 나오고 바로 뒤에는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가 나옵니다. 단군신화가 아싸 가오리 사관에 의해 쓰였다면 일본 건국신화는 신라 통일 이전에 건너간 조족이 구전으로 후세에 전해준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 건국신화에는 아싸 가오리가 없습니다. 영국의 경우를 살펴 봅시다. 중동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영국에 도착하여 부족 국가를 이룬 때는 고구려 신라 백제의 부족 국가 건설 시기와 비슷합니다.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시작 무렵 입니다. 유럽은 동쪽으로 부터 왔고 동아시아는 서쪽에서 온 것이 확실합니다. 전세계 기록이 중동에서 정확히 이야기 하면 아라랏산에서 시작 합니다. 그 이전의 각 지방에서 발견되는 유물은 어떻게 해석 해야 할지는 일단 여러분이 먼저 생각 해봅시다. 배(선船) 는 아라랏산에서의 제사 이전이고 피라미드는 아라랏산 제사 폐지 직후에 건설 되었습니다.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의 근원은 아라랏산이며 이곳을 중심으로 세계 각처로 흩어지게 된 것 입니다. 조족이 아라랏산에서 제사를 지냈고 제사장 민족이 되었습니다. 어느 나라 든 지 제사 지내는 자가 최상류층을 차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나라간 전쟁이 있다고 칩시다. 먼저 상대방 문화를 파괴하지 않고 그 나라를 이긴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 입니다. 항상 문화적으로 점령하고 뒤에 군사적 점령이 뒤따릅니다. 사족이 조족을 공격해서 2번의 승리 이전에 2번의 문화적 승리가 있었습니다. 2번의 승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가 공자를 앞세운 진시왕 이었고 두 번째가 불교를 앞세운 당나라 공격입니다. 2번의 승리로 사족은 조족을 궤멸 상태로 몰아 갔습니다. 진시왕이 분서갱유 이름 하에 책을 불사를 때에 공자의 유교는 무사한 것은 그것이 사족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교는 조족 제사에서 변형 된 것이라는 것을 일반인도 쉽게 알 수 있었으므로 사족은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그 후 2차 전 경우 당나라는 뭔가 정신적인 도움을 크게 얻었습니다. 일반인은 그것이 조족의 제사에서 변형된 것이라고는 생각키 어려웠습니다. 더욱이 조족까지도 불교를 받아 들임으로 해를 따라 동쪽으로 온 이유와 조족이 따로 존재해야하는 이유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망한 것 입니다. 오행성을 만드시고 그것을 운행하시는 아버지시여! 오행성 하면 다소 원시적이라 생각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별자리하면 점성술이 떠오르십니까? 기본 열두 별자리에다가 각각 3개씩 총 48자리가 있습니다. 이 별자리가 지구에서 볼때 계절에 따라 일정한 위치를 유지하며 무리지어 나타납니다. 우주에서 각자 궤도를 갖고 움직이는 별들이 어떻게 지구에서 볼 때 일정하게 나타는지요? 누군가 계획적으로 만들었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인용한 글중에 피라미드가 별자리를 기준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볼때 엣날에는 별자리가 굉장한 의미를 띠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점성술로 변질되어 그의미가 지금은 우리 마음에 와닸지 않을 뿐입니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민족들이 가지고 있는 별자리가 거의 일치 하는 것은 그 출발점이 하나가 아닐까요? 그것을 만들고 운행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2 별자리가 의미가 점성술의 별자리로 바뀌고 12지신(자축인묘....)으로 바뀌어져 지금의 우리는 깊이 있게 받아들이지 않게 된겁니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끝내고 위글에 대하여 하나씩 다시 검토 해봅시다. 단군의 기원이 기원전 2333년 부터 시작된다면 한반도의 고구려 건국 기록은 기원전 37년 약 2300년의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없어진 2300년 시간에 대해 직접적인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무엇으로 빈(없어진) 시간을 메울 수 있을까요? 중국 사족을 살펴 보면 한반도 거주인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 언어 구조 입니다. 아위농부(我爲農夫) I WILL BE A FARMER. 나는 농부가 될것 입니다. 주어 + 동사 + 목적어 (보어) : 중국 사족어, 영어(유럽어) 주어 + 목적어 (보어) + 동사 : 한반도 거주인 중국인은 영어을 쉽게 배울 수있고 실제 TOEIC 점수도 높습니다. 둘째 주거 문화 입니다. 침대 책상 걸상 탁자 입식 문화: 중국 사족, 유럽인 온돌 ………………..좌식 문화: 한반도 거주인 셋째 식문화 입니다. 빵, 밀: 중국 사족, 유럽인 밥, 쌀: 한반도 거주인 넷째 사고 방식 입니다. 사고 방식이 사족은 유럽인의 사고 방식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같은 점이라곤 외모즉 황색피부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중국 사족은 피부 색만 제외 하면 유럽인 입니다. 피부색이 황색이고 용(龍)을 따르는 것을 제외하면 영락 없는 유럽인이 아닌가 생각 듭니다. 조족이 먼저 중국에 자리 잡고 글자가 조족에서 시작 되었고 책을 쓰고 제문을 남겼습니다. 동방예의지국의 의미는 조족은 문화 민족 사족은 야만인 잔인 무도 무례한 민족임을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요? 그런데 고서(古書)의 언어구조는 왜? 중국 사족어 구조로만 되어 있을까요? 진시왕의 분서갱유 사건시 언어 구조가 조족어이면 무조건 불살라 없앴고 이후에도 이런류의 글은 집요하게 모두 없앤 것으로 생각 됩니다. 만일 일본의 한반도 지배가36년이 아니라 360년 동안 계속 되었다면 한글로 된 책과 한(韓)문화는 없어졌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현재 전해져오는 고서는 사족의 입장에서 사족만을 위한 글이 아닙니까? 조족에 의한 조족을 위한 모든 기록은 없어지고 일부 사족이 조족에 대해 기록한 책 밖에 없습니다. 조족에 대하여 알려고 하면 조자(造字)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타당한 방법이라고 생각 됩니다. 천(遷)에 대하여 다시 살펴 보면 "서(西)쪽에서 큰(대大) 무리가 걸어서 왔다" 의미 입니다. 조족이 큰 무리를 지어 걸어서 왔다를 생각해 봅시다. "민족의 대이동" 이정도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왜? 무리를 지어 중동에서 중국까지 걸어서 왔을까요? 엄청난 거리 입니다. 조자(造字)는 조족이 중간에서 별다른 지체 없이 끊임 없이 동쪽으로 동쪽으로 걸어 왔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절박한 사정이 없이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처자식을 이끌고 살아야 겠다는 일념으로 온 것입니다. 조족이 중국에 도착 할 때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마찰이 없었는듯 합니다. 홍익인간을 내세운 것을 보면 싸움이 없었던 걸로 보면 무난 합니다. 다툼을 피하여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곳 머나먼 동쪽으로 왔습니다. 조족이 전 중국을 차지하여 번성 하였고 나라 이름을 "은"이라고 부르고 문자(조자)를 만들고 살고 있엇습니다. 이때 서쪽 변방에 아주 작은 나라 "주"라는 나라가 생겨 났습니다. 주나라의 민족은 사족(한족)이 였습니다. 동쪽으로 원정 와서 은나라를 쳐서 식민국으로 삼았습니다. 어떻게 서쪽 변방 작은 나라가 전중국을 차지하고 있던 은나라를 공격할 생각을 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전중국을 차지할수 있었는지 그 배경에 대하여 살펴 보도록 합시다. 조자(造字)와 DNA지도와 양심에 근거하여 서로 생각 해봅시다. 기록이란 군사적 승리자 입장에서 합리화 시킨 부분이 많기 때문 입니다. 터무니 없는 기록을 파헤치기 위하여 철저하게 감정을 배제하고 사실만을 가지고 "예" "아니요"를 선택 합시다. 현재의 전세계 판도를 살펴 봅시다. 6 대주는 유럽, 북미, 남미, 오세아니아 ,아시아,아프리카 유럽, 북미, 남미, 오세아니아의 대체적인 지배층은 유럽계(언어구조,입식문화,밀주식) 입니다. 아시아도 인도 중국 러시아 아프리카도 일부 지배 하고 있습니다. 유럽계의 특징은 도전정신 즉 무슨일을 하면 목숨을 걸고 쟁취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중국사족도 유럽계로서 조족의 사고 방식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나라가 은나라를 점령 과정을 살펴 봅시다. 주는 서쪽 변방의 작은 나라 이였습니다. 왜? 남쪽이나 동쪽이나 북쪽이 아니고 하필 서쪽 입니까? 중동 쿠데타 집권층이 있던 곳이고 거기서 보냄 받았습니다. 중국 서쪽에 교두보를 마련한 사족은 정세를 살피고 동쪽 정벌에 나서게 됩니다. 아주 작은 나라였지만 뒷 배경이 든든하였고 충분한 군사 훈련 조족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동쪽 정벌에 나선 것 입니다. 동쪽의 조족을 동이족이라고 불렀습니다. 사(한漢)족 기준으로 보면 동쪽 이었기 때문 입니다. 동이족의 의미가 선생님 상전 귀족 그런 의미가 아닌 것으로 판단 됩니다. 동쪽 오랑캐 즉 쳐서 다 죽여야하는 대상으로 인식 하였습니다. 동이족과 같이 더불어 살겠다는 의지는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주나라는 은나라 점령후 동이족을 심하게 다루었다고 전해 집니다. 사족이 조족에 대한 행위는 잔인 포악하였다고 전해 집니다. 세월이 흐르자 조족의 반항이 시작 되었습니다. 나라가 혼란한 시기 즉 춘주 전국 시대에 접어 들었다가 다시 진시왕에 의해 통일되게 됩니다. 이때 조족은 엄청난 시련을 당합니다. 진시왕에게 붙잡혀 많은 조족이 죽고 일부는 도망가고 나머지는 사(한漢)족 행세를 했습니다. 도망자 일부는 유럽으로 흘러 들어 갔습니다. 이들이 훈족이라는 집단 입니다. 유럽을 뒤흔들었던 훈족의 정체를 알고자 얼마 전 훈족 지도자 아틸라의 유골을 발굴하여 그의 DNA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 하였습니다. 그는 "KOREAN"이라고 발표 하였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는 조족이고 훈족은 조족이라는 뜻 입니다. 처음부터 조족을 중국 땅에서 몰아 낼 의도 였습니다. 훈족에 대하여 이야기 해 봅시다. 로마 대제국 건설시 원정가서 점령하지 못한 민족이 게르만 입니다. 그러한 게르만 민족 대 이동을 유발한 가장 큰 원인이 훈족의 침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병만으로 침략하면 정복욕으로 볼 수 있으나 처자식을 이끌고 다니는 것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한 것 입니다. 진시왕에 의한 통일과 한나라의 토벌 시기와 일치 합니다. 진시왕의 급사(急死)로 한(漢)나라가 등장 합니다. 한(漢)나라 건국 세력은 진시왕 주위에 있다가 권력을 차지한 진시왕의 심복들 입니다. 진시왕의 계획을 최측근에서 수행하던 자이므로 진시왕의 조족 멸족 작업은 계속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동쪽으로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도망친 것과 같이 또다시 서쪽으로 도망친 것 입니다. 뒷날 훈족이 로마와 겨루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훈족(조족)을 중국에서 내몰아낸 사족의 전투력은 로마군에 뒤지지 않는 것으로 생각 됩니다. 사족의 전투력은 세계 최강 그것 이었습니다. 중동 쿠데타 집권 세력이 조족을 견제하기위해 동쪽으로 보낸 사족은 중동 쿠데타군 중에서 최정예 군단으로 생각되는 대목 입니다. 사족은 조족을 동이족이라 불렀고 또한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렀습니다. 동방예의지국을 한국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사실을 똑바로 보지 못한 결과라고 봅니다. 동방예의지국이 중국의 동쪽 나라라면 일본이나 미국은 왜 해당되지 않는지요? 동방예의지국이 널리 쓰인것은 기원전 춘추전국시대 입니다. 그때 한반도나 미국에는 나라의 기록이 없습니다. 그들의 행동을 보고 널리 알려지고 그렇게 불리었다면 그이전 오래전에 동쪽에 나라가 있어야 하는게 아닙니까? 그때 분위기로 봐서도 미국이나 한국을 지칭 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동이족 이라고 부르면서도 조족 문화가 사족 문화 보다 앞선다고 인정 하였습니다. "군자국 국민" "동방예의지국 국민"이 어찌하다가 땅도 빼앗기고 많은 사람이 죽거나 도망치거나 숨어지내야 했고 더 나아가 "미개인" " 야만인" "침략자" "미신 숭배자" "점치는 자" 들로 바뀌어져 누명까지 쓰게 되었을까요? 아주 궁금한게 있습니다. 조물주를 수호신으로 내세운 조족과 사(용龍)를 수호신으로 내세운 사족과의 싸움에서 왜? 사족이 이길 수 있었까요? "조" "사" 누가더 강했는지가 궁금 합니다. 피라미드가 이것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의 시대는 기울고 조물주의 시대가 온 것 입니다. 조물주의 이름을 걸어 놓고 잘못을 행한 결과 엄청난 일을 당했습니다. 그 어두웠던 시기의 기록은 다시 검토 되어져야 하고 그때의 뛰어 났다고 생각 되는 인물들은 재 검증 되어져야 합니다. 조족의 종교를 미신으로 몰아서는 안됩니다.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유교, 불교의 뿌리가 조족 제사 입니다. 조족이 죽음으로, 추방으로, 숨어서 사족행세하여 숨어 사는 원인이 미개해서가 아니라 사가 조족을 살려 두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공양에 대한 정의의 심판은 그 표면적인 이유이며 숨겨진 진짜 이유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전(田)은 현재 지도 상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천지 개벽이라할 정도의 그이전 입니다. 진리의 본질을 온세계에 드러 내는 글자 입니다. 마귀(魔鬼)라는 글자를 살펴 봅시다. 귀자를 보면 밭(전田)에 있는 사람에게 몰래 다가 왔다는 의미 입니다. 사기쳤다는 의미 입니다. 그래서 시(始)작 된 것 입니다. 사기친 것을 명백히 밝히는 민족인데 살려 두었겠습니까? 사의 시대는 기울고 조물주의 시대가 온 것 입니다. 조물주의 이름을 내세우고 잘못을 행한 결과 엄청난 일을 당했습니다. 그 어두웠던 시기의 기록은 다시 검토 되어져야 하고 그때의 뛰어 났다고 생각되는 인물들은 재 검증 되어져야 합니다. 조족의 종교를 미신으로 몰아서는 안됩니다. 유대교,이슬람교,기독교,유교, 불교의 뿌리가 조족 제사 입니다. 조족이 죽음으로, 추방으로, 숨어서 사족 행세하는 원인이 미개해서가 아니라 사가 조족을 살려 두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사족(한족:漢族)황제가 동이족 황제에게 글을 배워 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은나라때 쓰던 글이 우리가 부르는 한자(漢字)로 불리어지게 된 것 입니다. 조자를 분석하면 조자는 조물주와는 분리할 수 없는 관계 입니다. 조造 시始 전田 제사祭祀 혈血 선船 과果 나裸 사족은 처음부터 제사를 없애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제사가 조족의 몫이고 제사장이며 왕권을 상징하였기 때문에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없애 나가기 시작 하였습니다. 은나라 점령후 처음에는 조족 방식대로 제사를 지내는 척하다가 전혀 엉뚱한 제사를 지내 제사의 본질을 흐렸습니다. 초기 제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공자 이전 시대 사람이 지은 제문 입니다. 5행성을 만드시고 그것을 운행하시는 아버지시여! 우리가 어떻게 제사를 지내야 할지 모르나 정성껏 지내니 받아주소서! 조물주에 대한 제사가 명백합니다. 제주는 자연 천자(天子)가 되는 것 입니다. 공자께서 제주가 제사를 지내고 고기를 나누어주지 않아 섭섭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공자시대 까지는 제사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공자께서 조물주 대신에 조상으로 피대신에 일반 음식으로 대체한 것으로 판단 됩니다. 제사는 사족에게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조족에게서 출발한 것이 분명 합니다. 조자는 조족에게서 출발한것이 확실 합니다. 사족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용을 따르고 있습니다. 내용출처 : [직접 서술] 공자에 관한 이야기는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