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기!’의 혼다 라이프

 

최근 월드베이스볼 클래식에서 한국과 일본의 경기를 봤습니다. 야구경기를 즐겨 보는 편은 아니지만, 역시 한일 최고선수들의 대결이라 그런지 무척 흥분이 되더군요. 두번째 경기에서 일본에 완승을 거둔뒤 투수 서재응이 LA의 야구장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고 깃발에 키스하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는데요. 한일 우호를 외치는 2006년에도 우리 젊은이들 마음 한구석엔 그런 반일감정 또는 컴플렉스(서재응 스스로 인터뷰에서 그렇게 표현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가 여전히 깊게 박혀있음을 역설적으로 실감하게 해주었습니다.

 

 

2004년 일본에서 만들어진 영화 ‘박치기!’(원제가 박치기입니다. 가타카나로 그렇게 써있습니다)는 1960년대 재일교포 고교생들과 일본 고교생들의 불같은 대립, 그 속에서 담긴 우정과 사랑을 그린 영화인데요. 국내에서 최근 개봉됐습니다. 제작자가 재일교포 이봉우인 것을 빼면 거의 모든 출연·스탭진이 일본인이지만, 당시 재일교포 사회의 차별과 분노, 어린 학생들 눈으로 본 일본사회의 완강한 고정관념 등이 강렬하게 묘사돼 있는 게 놀랍더군요. 보통 일본인들은 다테마에(겉치레)와 혼네(속마음)라고 해서 혼네를 열어보이지 않고 우회적으로 한참 돌려 얘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적어도 이 영화의 이야기 전개 방식은 시원하고 통쾌한 맛이 있어 완전히 한국식처럼 느껴졌습니다.

 

 

주제는 꽤 무겁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코믹하고 가볍고 유치합니다. 1960년대 당시의 재일교포 북송, 한반도 통일염원 등 일본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풀기어려운 한반도 문제는 전부 건드리고 지나갑니다만, 그런 내용을 설교조가 아니라 그저 젊은이들이 치고받고 싸우고 사랑하는 과정 속에 아주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지요. ‘매그놀리아’ 류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아주 특이한 경험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1968년 일본 교토에는 히가시(東)고 학생들과 조선고 학생들 사이에 연일 싸움이 계속 됩니다. 히가시고의 코우스케(시오야 슈운)는 선생님의 명령으로 조선고에 친선축구시합을 제안하러 갔다가 음악실로 잘못 들어가는데요. 그곳에서 경자(사와지리 에리카)와 마주치고는 그만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말지요. 코우스케는 경자의 환심을 사기위해 선배 사카자키(오다기리 조)로부터 금지곡인 한국노래 ‘임진강’을 배우게 되면서 그전까지 몰랐던 조선인의 감정을 차음 이해하게 됩니다. 한편 경자의 오빠 안성(다카오카 소우스케)이 주축이 된 조선고 학생들에게 흠씬 얻어맞은 히가시고의 무리들은 인근 폭력배까지 동원해 복수를 시작합니다.

 

 

이 영화에도 주목할만한 차가 나올까요? 안 나온다면 이 글을 쓰지 않았겠지요. 영화 맨 마지막에 자막 올라갈때 고우스케가 차를 몰고와 경자와 데이트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차가 눈에 확 들어옵니다. 1970년대 일본의 유명한 경차중 하나인 ‘라이프’입니다. 혼다 라이프는 혼다가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생산했는데요. 이전 혼다 경차를 대표했던 N360 N600(1967~1972년)의 발전형이 아닌 전혀 새로운 모델로, ‘구형보다 넓고 조용한 차’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1971년 6월부터 판매되기 시작했습니다. N360이 공냉식엔진이었던 것에 비해, 수냉식엔진으로 바뀌고 밸런스쉬프트 등을 채택해, 진동 소음이 크게 줄었다고 합니다. 실내 역시 이전까지의 경차보다 더 넓은 공간을 자랑했고요. 이전 경차들은 2도어가 대부분이었지만, 뒤쪽에 문을 달아 편의성을 높인 것도 특징입니다. 길이 2995mm, 너비 1295mm, 높이 1340mm에, 앞뒤 차축간 거리는 2080mm로 지금 보면 경차중에서도 초미니 사이즈입니다. 공차중량은 520kg, 356cc 엔진을 얹어 8000rpm이라는 고회전에서 최고출력 30마력을 냈습니다. 당시 판매가는 44만3000엔이었습니다.

 

 

혼다 라이프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197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차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은 디자인에 차체 균형미도 무척 뛰어납니다. 물론 0.4리터가 채 안되는 작은 엔진에 초소형 차체는 GM대우 마티즈가 큰 차로 보일만큼 앙증맞음 그 자체이지만, 그런 엔진을 달고도 35년전에 회전수 8000rpm까지 올려 30마력을 뽑아냈다는건 역시 혼다 기술력이 어제오늘 나온게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영화에 라이프가 등장하는 것은 고증 차원에서 다소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영화의 시대배경은 1968년. 고우스케와 경자가 영화 마지막에 데이트하는 시점도 늦어봐야 1969년이나 1970년쯤일텐데요. 1971년 6월부터 발매된 라이프가 등장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것 같습니다.

 

 

라이프는 1974년 단종됐다가 1997년 같은 이름을 가진 5도어형 MPV 스타일의 자동차로 부활합니다. 2003년에 모델이 완전히 바뀌었는데, 660cc 3실린더 엔진에 옵션으로 터보차져와 4단자동변속기가 들어갑니다. 길이X너비X높이는 3395X1475X1580mm로 1970년대 라이프보다 많이 커졌지만 여전히 소형차에도 미치지 못할만큼 작지요. 최고급형인 라이프 디바 터보 모델은 공차중량 880kg에 658cc SOHC 터보 엔진을 달아 6000rpm에서 64마력을 냅니다. 가격은 134만4000엔입니다. 라이프는 현재 일본에서 월평균 1만1000대 정도가 팔릴만큼 인기 경차입니다.

 

 

영화에는 오다기리 조 등 일본 청춘스타들이 꽤 많이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경자 역의 사와지리 에리카는 정말 한국인이 아닐까 싶을만큼 귀엽고 친근한 느낌입니다. 1986년 도쿄에서 태어났으며, 패션잡지 모델을 하다 2002년 후지TV ‘올해의 비주얼 퀸’에 뽑히면서 TV드라마에 계속 출연중입니다. ‘박치기!’로 2005년 일본아카데미영화상 신인상등 그 해 영화제 신인상을 휩쓸었습니다.

 

‘박치기’의 감독 이즈츠 카즈유키는 최근 한국서 가진 인터뷰에서 “일본인들에게 과거 60년대 일본의 상황과 당시 일본인들이 가졌던 마음을 다시 기억하게 하고 싶어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얘기했습니다. 예전에 ‘공각기동대’ ‘이노센스’의 감독 오시이 마모루를 한국에서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그 역시 “요즘 일본의 젊은 세대는 학생운동이 대단했던 1960년대 일본 전공투세대와는 전혀 다르다. 1964년 도쿄올림픽을 기점으로 일본은 완전히 변했다”고 얘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 것에도 절박함이 없는 세대. 한국의 젊은 세대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사실이 아닌 기성세대의 괜한 오해일 수도 있겠고요. 하지만 ‘박치기!’에는 거칠지만 순수했던 1960년대 일본의 모습 그리고 우리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