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초기에 국군 전투력이 형편없었던건 어쩔 수 없었던 사실이죠.
하지만 북한군이 소련의 지원으로 워낙 현대화 되어 있었고 국공 내전에 참전했던 조선족 지원병들로 병력을 구성해서 인민국의 전투력이 좋았던 이유도 있습니다.
8월 낙동강 방어전에서 미군의 사단 돌려막기가 아니었으면 마산쪽으로 돌파되어 한반도 전체가 적화될 엄청난 위기였죠. 미군도 초전에 스미스부대가 오산전투에서 패배하고 24사단이 대전에서 패배하는등 북한군의 전투력에 혼줄이 났었죠.
서울 수복후에 북한군의 지리멸렬으로 전광석화 처럼 북진하여 오로지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낸다는 달콤한 환상으로 북진했다가 중공군의 참전으로 운산전투에서 대패했고 미 해병대는 장진호 전투에서 돈좌후 처절한 후퇴를 했습니다.
운산전투에서는 우리 한국군 뿐만이 아니라 미군도 큰 피해를 입었고 이는 중공군의 참전을 무시한 맥아더 사령부의 오판이 큰 원인이기도 합니다.
군군의 전투력이 떨어지는 것은 미군에 비해서 편제 화기도 부족하고 아무래도 전시라서 충분한 훈련이 부족했던 점이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리전투는 중공군이 국공내전에서 즐겨 써먹던 유인 후 우회 차단 전술에 퇴로상 오마치고개가 점령되는 바람에 국군3군단이 산산이 부서진 비극적인 전투였습니다.
실제 인제 현리를 방문해 보면 엄청 험준한 지형이었고 아마 미군이었어도 그런식으로 후퇴로가 막히면 분쇄될만한 전투상황이었죠.
물론 미군이 그렇게 포위되었다면 어마어마한 화력지원과 공중지원으로 오마치 고개를 박살 냈겠지만 당시 3군단은 군단장 유재흥이 제일 먼저 튀었고 불쌍한 보병들이 방태산을 넘다가 수없이 전사하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미군의 공중 지원은 있었죠. 아군 3군단이 유기한 장비를 적군이 차지할 수 없게 파괴하는 공격을 미 공군이 수행했습니다.
이후 국군의 전투력에 대해 미군은 의심을 했으며 종전 전까지 중부전선과 동부전선의 수많은 고지전에서 국군은 무수히 많은 희생을 겪으며 다시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국군의 전투력이 형편없었던 것은 사실 이지만 그 원인과 그후의 대처에 대해서도 감안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어정쩡한 포지션 때문에 여러 공과가 있지만..
우리는 과거에 있었던 역사로서 그에대해 미국이 잘한점과 우리에게 피해를 입힌점은 명명백백하게 기록하고 후손에게 객관적으로 알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막연한 적개심으로 공보다 과를 우선시 하는게 일반적인 우리 국민의 뜻일까요?
영페이스 님은 님글에 달리는 반대 갯수 보시고 곰곰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미국이 개항시기에 우리에게 입힌 피해는 공산화의 위기에서 그들이 치룬 막대한 희생으로 어느정도는 상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놈들이 우리를 식민지화 하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후 패망하자 소련과 미국은 나누기 편하다는 이유로 38도선을 그어버렸습니다. 사실 그 당시 미국입장에서는 극동의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인 대한민국은 아무런 이득도 없고 별 가치없다고 생각하던 시기였으니까요.
그래서 에치슨라인에서 한반도가 제외되었고 이는 김일성의 오판과 소련의 지원에 큰 원인이 되었죠.
이번 아프카니스탄 사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광복후 76년이나 지났지만 국제정세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