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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기의 첫 번째 절기인 입춘(立春)이 돌아올 때마다 단골손님 대접을 받는 글귀가 있다. ‘입춘대길(立春大吉)’과 ‘건양다경(建陽多慶)’이 그것. 전자(‘立春大吉’)는 별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후자(‘建陽多慶’)는 호사가들의 입길(口舌)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 같다. 그 유래에 대한 ‘설(說)’이 여럿이다 보니 ‘설(舌)’이 편하지 못한 것이다.
이번 입춘에 즈음해서도 그런 일과 맞닥뜨려야 했다. 지인 두 분이 이틀 사이 두 글귀가 짝을 이룬 입춘첩(立春帖=입춘 날 대문이나 들보·기둥·천장 등에 써 붙이는 글귀) 사진을 보내온 것. 그뿐만이 아니다. 그보다 일주일 전쯤, 연세 지긋한 서예가 한 분이 설 명절 얘기를 풀어내는 글에서 ‘건양다경(建陽多慶)’이란 글귀의 친일성(親日性)을 들어 멀리해야 한다고 강조한 일이 그것이다.
의견을 구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잘 아는 서예인들에게 ‘건양다경’은 쓰지 말라고 타일러도 도무지 말을 안 들어요.” 일제 강점기, 서슬 퍼런 조선총독부의 꼼수가 배어있는 만큼 절대 써선 안 된다는 게 그분의 지론이었고, 간추린 내용은 이랬다.
“‘건양다경(建陽多慶)’이란 조선총독부가 설을 음력으로만 쇠기를 고집하는 고종 황실과 우리 백성들을 어르고 달래려고 일부러 만들어낸 거지요. ‘양력설을 쇠면[建陽]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긴다[多慶]’는 의식을 심어주겠다고 일종의 주입식 훈령을 내린 셈이라 할까.”
그러나 ‘건양다경’이란 글귀의 유래를 달리 풀이하는 이들은 의외로 많았다. 잡학다식(雜學多識)의 대명사인 포털사이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중의 하나가 고종 임금의 연호인 ‘건양(建陽)’에서 따 왔다는 설이다. (혹자는 우리나라가 고종의 명에 따라 ‘태양력’과 ‘요일’을 사용한 시기를 1896년으로 보기도 한다.)
한 누리꾼은 ‘조선왕조 고종 시절 나라의 위태로움을 걱정하며 집집마다 ‘건양다경’이라고 써서 붙인 것이 시초라고 보는 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두 글귀를 이렇게 풀이했다. “입춘이 되니 크게 길할 것이요, 따스한 기운이 도니 경사가 많으리라.
출처 : 울산제일일보(http://www.ujeil.com)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 허목과 우암 송시열이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숙종 임금이 입춘을 맞아 허목에게 좋은 글귀를 청하자 바로 ‘立春大吉’이란 글귀를 지어 올렸고, 그의 유명한 맞수인 송시열이 이에 뒤질세라 ‘建陽多慶’으로 응수했다는 설이다.
그러나 국립민속박물관의 해석은 또 다르다. ‘건양(建陽)’은 ‘양춘(陽春)’이 선다는 뜻으로 ‘입춘’과 같고, ‘다경(多慶)’은 경사, 즉 복이 많다는 뜻이니 ‘대길(大吉)’과 동의어라는 것. 민속박물관은 두 구절이 정연한 대구(對句)로서 뜻을 강조하기 위해 유사한 표현을 중복시켰다고 보는 것이다.
박물관의 글쓴이는 이런 말도 덧붙인다. “지금은 어문(語文) 생활에서 한문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한문과 관련된 전통문화의 단절도 심각한 정도로 진행되고 있다. 한문(漢文) 문화의 한 측면인 입춘첩(立春帖) 풍습이 아직 없어지지 않고 있다니 다행스럽다. 인문(人文) 정신이 깃들어 있는 이 풍습이 앞으로도 면면히 이어지기를 기원한다.”
하지만 필자의 시각은 조금 다르다. 한문세대와 한문문화가 저물어가는 이즈음, 꿈과 생각이 번뜩이는 ‘젊은 한글세대’들이 입춘에 맞춰 산뜻한 한글 글귀라도 새로 지어 붙이게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그렇지 않아도 왜색(倭色)이 짙을 수도 있는 글귀 ‘건양다경’의 유래나 뜻도 모른 채 그저 갖다 붙이기에 급급한 세태가 너무 딱해 보여서 한번 해보는 소리다.
김정주 논설실장
출처 : 울산제일일보(http://www.uj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