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건 장례식에서 최용건의 눈물 




북한에서 빨치산파하면 모두 김일성파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오해다.

항일연군은 최용건의 북만주와, 김일성의 동만주는 분위기가 완전 달랐다. 특히 최용건의 부하들은  김일성을 애송이로 보는  경향이 많았다.


 

최용건,김책,허형식은 계급으로 따지면 김일성의 상관이지, 부하가 아니었다. 물론 나이가 김일성보다 다들 연상이었지만, 어쨌든 최용건부대는 정규군 분위기였던 반면 김일성부대는 가방끈이 짧아서 산적 분위기라고  무시하기 일수였다고 한다.

 

 

해방된후 김일성파들은  배타고 입국했지만  최용건파는 만주를 거쳐 한달 늦게 들어왔다. 특히 강건은 연길, 김광협은 목단강에서 조선족들의 모병을 위해 만주에 남았다.

 

 

소련이 김일성을 미는 분위기라 최용건일파는 모병을 통해 "군력"을 키우는 방향을 모색했다고 할수 있다. 최용건과 김책은 국내에 들어와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에 참여한다.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이 조만식과 김구의 반탁이다. 조만식이 죽어라 반탁 안했으면, 북한 초대 주석은 조만식이었을 것이고 남한은 여운형이 될 가능성이 많았다. 

 

 

조만식의 반탁은 김일성에게 엄청난 행운이었다. 소련이 입국전부터 김일성을 선택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소련은 미소공위 전까지만 해도 이승만에 대항할 북한인사는 조만식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조만식은 임시정부 주석을 준다는 조건마저  거절했고  2순위였던 김일성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최용건파는 썩은 동아줄 잡은 셈이 되었다. 조만식이 반탁시위를 하고 다니니 최용건은 말리러 다니기 바빳다. 조만식이 연금 당한 후에는 차기의 희망마저 사라졌다. 그래도 삼당합당으로 거국연립정부가 만들어질때 최용건파에게 힘이 있었다.  북만주파가 군부지분을 가져온 것이다. 



6.25에서 김일성은 두번째 행운을 얻는다. 김책과 강건은 최용건의 손발이라 할수 있었는데  전쟁에서 둘다 사망한 것이다.  얼마나 억울한지 강건 장례식 때는 눈물까지 보일 정도였다. 이제 김일성을 견제하는 것도 버겹게 되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군대에 김일성 우상화가 그렇게 까지 퍼지지 않았다. 최용건의 부하였던 김광협과 김창봉이 군부를 잡고 있었고 김일성을 엿같이 봐서 우상화를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69년 세습을 원했던 김정일과 김영주는  군부를 손에 넣기 위해 김광협과 김창봉 등 북만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한다.

 

 

마지막 남았던 측근 김광협의 숙청은  온건파로 알려진 최용건마저 참을수 없게 했다.  74년 10대원칙으로 우상화와 세습이  노골화되자 남일과 함께 세습반대를 표명한다.

 

 

76년 남일은 우연한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최용건은 연금당하다 시피 된다. 그 상태에서 병사(?)하게 된다.

 

최용건은 독립운동사에서 최고의 능력을 가진 인재로 알려졌다.  하지만 최용건의 능력도 김일성의 운빨만은 못했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