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민회 조직자인 장일환의 생전모습.(유족 제공)
부쳤고 암호를 만들어 사용했다. 광역화하는 조직을 통제하기 위해 조직과 목적, 행동요령 등 정관을 만들어 회원들에게 전달했다. 기관지 국민보를 발간해 국내외에 비밀리에 배포하기도 했다.
숭실학교 졸업생인 회장 장일환은 배민수, 백세민 등 숭실학교 출신 후배들과 함께 평양 학당골에 있는 리보식의 집에 모여 조선국민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손가락을 잘라 '대한독립'이라는 혈서를 쓰는 등 죽음을 각오한 항일투쟁을 맹세했다.
그러나 조직이 커지면서 일제 경찰에 발각돼 1918년 2월 9일 장 회장을 비롯해 핵심 회원 25명이 체포됐고 다른 회원들은 지방이나 만주로 피신했다.
1990년 장일환에 추서된 독립장
자료사진
이들은 훗날 대한국민회나 한국국민회 그리고 만주지방에서 조직된 한국국민회 등에서 독립운동을 벌였고 3·1운동에 참여했다.
장일환은 일제 경찰의 모진 고문 끝에 체포된 지 두 달만인 1918년 4월 10일 32세의 젊은 나이에 두개골과 대퇴부가 으스러진 채 평양구치소에서 순국했다.
운송업, 광산업 등의 사업을 하는 부호 집안 출신인 장일환은 20대부터 독립을 위해 교육과 선교, 비밀 항일투쟁을 병행했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많은 자금을 조달했다.
그는 1912년과 1914년 두 차례에 걸쳐 비밀리에 하와이를 방문해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에 맞서 무장투쟁론을 주창했던 박용만
독립기념관에서 관련 자료를 찾아내 묻힐 뻔했던 그의 독립운동을 세상에 알렸다.
조선국민회 조직자인 장일환의 장손인 세진씨
자료사진
조선국민회 활동이 한국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 데는 자료의 부족도 있었지만, 한
한반도의 분단과 냉전도 큰 몫을 차지했다.
조선국민회 회원 중에는 북한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 김형직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조선국민회가 김형직의 주도하에 결성됐으며 "우리나라 반일민족해방운동발전의 새로운 단계를 열어놓은 역사적 사변"으로 평가한다. 조선국민회 창설 100주년인
2017년에는 헌법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중앙보고 대회를 성대히 열었고 주민들에게 조선국민회 결성 장소인 '학당골' 참관을 장려했다.
북한이 김형직을 조선국민회의 핵심 조직자로 선전하면서 북한과 연계된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을 외면해왔던 한국에서는 조선국민회에 대한 연구가 소홀할 수 밖에 없었고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장세진씨는 13일 *****와의 인터뷰에
"조선국민회가 북한과 연관돼 있어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 염려가 됐고, 남쪽에서도 연구자가 별로 없는데다 생각도 다 달라 부담이 됐다"며 "갈등이 생기는걸 원치 않아
'이달의 독립운동가' 신청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역사 연구가들은 김형직이 핵심 인사인 것은 맞지만, 그가 조선국민회 결성을 주도했다는 것은 다소 과장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난 30년간 김일성 주석의 항일빨치산 활동을 연구하며 왜곡 과장 사실을 밝혀온 중국 옌볜(延邊) 조선족 출신 유**(57) 작가는 2017년 출간한 '김일성평전'(상권)에서
숭실학교 졸업생인 장일환을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고 김형직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고 기술했다. 장일환이 중심에 있었다는 얘기다.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김형직 독립운동 사료
북한 김일성 주석의 부친인 김형직이 항일 비밀결사를 통해 독립운동을 펼쳤음을 입증하는 사료가 독립기념관에 소장돼 있는 사실이 확인됐다. 왼쪽은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현대사 자
료'(강덕상 편저.1967) 조선편 1권, 1918년 2월 18일 일제에 의해 체포된 조선국민회 회원 명단 속에 김형직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오른쪽은 1918년 9월 12일자 신한민보의
조선국민회 관련자 체포 기사. 2005.3.23.
일제의 평안남도 경무부장이 조선국민회 회원 25명을 체포한 후 작성한 조사자료에도 김형직은 장일환, 백세빈, 배민수에 이어 네 번째로 명단에 등장한다
유 작가는 장일환이 평양구치소에서 고문으로 옥사하기 수일 전 바람을 쐬는 시간을 틈타 함께 투옥된 김형직에게 조선국민회를 부탁하며 독립 투쟁을 이어가 달라는 유명(遺命)을
전했다고 김일성평전에서 밝혔다.
김형직은 장일환의 순국으로 사실상 와해된
조선국민회를 복구하기 위해 가족 부양에 대한 의무를 버리고 만주로 건너가 '직업 혁명가'로 나섰다고 유 작가는 덧붙였다.
김일성 주석의 자서전인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1권에서도 "아버지(김형직)는 장일환, 배민수, 백세민 등 애국적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리보식의 집에서 조선국민회를 결성했다"고
기술했다. 조선국민회 핵심 4인을 언급한 것이다.
김 주석은 아버지가 동창생인 백세민, 리보식과 가깝게 지냈다며 이들을 '명망 높은 청년선각자들'이었다고 적었다.
조선국민회의 초대 멤버이자 막내로 당시 연락책 역할을 했던 배민수는 광복 후 숭실대 초대 이사장을 지냈으며,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사료)..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