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학군을 토벌하던 안태훈(안중근의 부친)에게 의탁하게 된 경우는 다음과 같다.

동학군은 무장과 조직력에 밀려서 전멸한 단계에 들어섰는데 안태훈으로 부터 투항 권유를 받았다. 동학군과 관군은 적군이었지만 관군의 배후는 민씨일가였으며 민씨일가는 청나라와 일본을 끌여들어 동학군을 진압하였고 관군의 일부는 일본군의 지시를 받는 상황을 개탄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안태훈은 유학자로 황해도 관찰사의 요청에 의하여 산포군을 창설하여 동학군을 토벌하였는데 동학군이라하더라도 조선백성을 토벌하는 것에 상당한 거부감이 있었으며 이와같은 생각은 안중근에 영향을 미쳤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투항한 김구는 관군이나 일본군의 추가적인 처벌을 피하기 위하여 안태훈에게 의탁하였다.


2.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 척살 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일본 상인이라는 것은 일본의 주장이다. 상인일 가능 성은 낮다. 이사건은 거의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판단된다.

김구는 치하포구의 여인숙에 머물렀는데 한복을 입고 성이 정씨인 사람을 만났다. 김구는 이 정씨라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자신의 출신지하고는 다른 서울말씨를 쓰고 있었고 두루마기 밑에 칼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민비사건에 연관있는 사람으로 판단하고 급습하여 살해하였다. 이름은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였는데 일본의 기록에 평범한 상인이라고 나와있지만 최소한 일본인인 것을 적시하고 있다. 일본인이 한복을 입고 한국인인척 하면서 칼을 차고 다닌다는 것은 당시로써는 매우 기이한 일이었다. 당시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한 일본인이 굳이 한국인인 척할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상인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여기서 부터 추가 설명-----------------------------------------------------------------

 

스치다의 신분에 대해서는 극우일뽕충들은 이즈하라 무역상의 고용인으로 조선에 행상하러온 약장수로 기록되어 있고 한국인 통역관 임학길을 대동하고 다녔다라고 되어 있다. 한복을 입고 한국인으로 위장한 이유는 당시 단발령으로 일본에 대한 반일감정이 높았기 때문에 한국인으로 위장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당시 일본공사관의 기록에 의한 것이다. 백범일지를 제외한 다른 모든 기록도 일본공사관의 조사보고서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어떠한 자료를 찾더라고 일본측의 주장밖에 나오지 않는다. 문서와 자료에 근거 하여 사실이라고 판단한다면 일본의 주장이 옳다고 믿게 된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일본의 주장은 항상 자신들을 정당화하고 사실을 숨기는 방향으로 작성되는 경우가 많다.  램지어 하바드대 교수등을 통하여 위안부관련 논문을 작성하고 게제하게 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지금은 논란이 많이 있고 논문에 대해서 비판도 높지만 수십년의 시간이 지나면 비판은 잊혀지지만 논문은 남아서 증거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후손들은 램지어의 논문을 들고 그것을 근거로 위안부는 매춘부라고 할 것이다.

 

어쨌든 스치다에 관련된 일본공사관의 기록은 논리적인 헛점이 많다. 

 

1. 무역상이라면 보통 항구와 인근에서 거래를 한다. 굳이 행상으로 짐을 지고 내륙으로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2. 단발령과 민비살해로 반일 감정이 높은데도 목숨을 걸고 행상을 할 이유가 없다. 정상적인 무역상이라면 사전에 분위기를 파악하고 철수하거나 은신할 것이다. 

 

-참고로 을미사변을 조선을 먹으려는 일본의 치밀한 계획이었으며 사건을 저지른 이후 이를 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가 벌인일로 꾸미려고 하였으나 당시 조선에 있던 외국공관의 보고에 의해서 이를 조선인들간의 갈등에의해서 조선인이 일으킨 사건으로 만드는데 실패를 하게된다. 만일 외국공관의 보고로 각국정부에 알려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 일본의 자료에 의해 우리는 민비를 살해한 것은 대원군의 사주를 받은 한국인으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3. 쓰시다가 당시 가지고 있던 돈은 엽전 열섬 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섬은 한드럼 정도이다. 즉 10드럼정도의 엽전이다. 물론 이것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불가능 하기 때문에 다른 수단으로 가지고 다녔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행상으로 판매한 약의 대금으로써는 지나치게 큰 금액이며 보통 서너명이 동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쓰치다는 통역관이라는 조선인 한명과 단독으로 행동하였다.

 

4. 백범은 쓰시다가 일본군 중위라고 하였는데 이는 죽인 후 소지품을 뒤져보니 육군중위 스치다 죠스케이고 엽전 800냥이 나왔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육군 중위라고 계급과 신분이 특정되었다는 것이다. 육군 중위가 아니라 을미사변에 참가한 일본 낭인(실제로는 일본군)이나 더 높은 직급을 주장하지 않았을까? 옆전 800냥을 비롯한 증거물은 일본공사관의 조사에 의하여 회수되었으며 김구가 확인했다는 일본군 중위의 신분(신분증, 소지했다는 칼 등)은 근거가 없어졌다.

 

5. 김구에 의하면 쓰치다 죠스케는 황해도 출신이라고 하면서 서울말씨를 쓰는 사람이었다. 임학길이라는 통역관을 데리고 다닌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명백히 황해도 출신을 주장하며 서울말씨를 쓰는 사람은 임학길이 아니다. 이 사건은 임학길이 신고를 함으로써 알려지게 되는데 임학길은 통역관이라기보다는 길안내역 겸 하인으로 볼 수 있어 본인의 책임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쓰치다에 대한 기록은 백범일지를 제외하면 일본공사관의 조사보고서를 기초로 하고 있다. 당시 한일관계를 고려하면 일본공사관의 조사보고서에 반대할 만한 한국측의 기록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대부분의 해설 심지어는 우리나라에서의 해설도 일본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스치다는 상인으로 기술된다. 심지어는 어떤 경우 김구가 무고한 일본상인을 때려죽인 잔인무도한 사건으로 설명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