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합병일인 1910년 8월 29일 칙령 제318호 ‘한국 국호를 개정하여 조선으로 하는 건’을 공포하며 한국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고, 대한제국 신민들을 조선인으로 칭했다.


일본은 대외적으로 조선은 일본의 영토이고, 조선인은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일왕(일본 천황)의 신민이라고 주장해왔으나 대내적으로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엄격히 구분했다. 1918년 4월 ‘공통법’을 시행하면서 일본제국의 내지(內地)와 외지(外地)를 구분했다. 일본 본토를 내지, 조선·대만·사할린 남부(1944년 내지로 편입) 등 식민지를 외지로 분류했다.


강제 병합을 했음에도 일본은 자국 국적법을 한반도에서는 시행하지 않았다. 한국인에게 일본 국적법을 적용할 경우, 한국인의 국적 이탈(제20조)을 통한 반일 저항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적도 구별되었다. 일본인(내지인)은 내지 호적에 등재된 반면, 조선인은 합병 이후 조선호적령(총독부령 제154호)에 따라 조선 호적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조선인은 내지(일본) 호적으로 전적(轉籍)할 수 없었고, 일본인도 조선 호적으로 전적할 수 없었다. 혼인과 입양 등을 통한 전적만 가능했다. ‘국적’법은 적용하지 않고 ‘호적’령은 따로 만들 만큼 두 시민권이 엄격히 구분되었던 것이다.


다만 손기정 선수처럼 조선인도 해외에 나갈 때는 표지에 ‘대일본제국’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여권을 발급 받았다. 물론 여권에 이 사람의 ‘국적은 일본’이라고 쓰여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해외에서는 일본인 취급을 받았던 셈이다. 조선인에게 발급된 여권은 1년에 50회도 되지 않았다.


권리와 의무는 국적과 더욱 거리가 멀었다. 당시 열혈 친일세력들이 일본에 완전 동화되기를 원하며 일본국민 대우를 해달라고 참정권을 청원했음에도 일본은 허용하지 않았다.


조선인은 병역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아예 징병검사 대상자를 일본 호적법 적용자로 한정하여 조선 호적 소속자는 제외했다. 한국인들의 징병제 실시 청원조차 거부했다. 군사지식과 무기를 갖춘 한국인들의 저항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국 전체주의 체제가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국적법 적용도 받지 않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징병과 징용으로 강제 동원되었다. 이때는 병역법 개정, 육군특별지원병령, 국가총동원법, 국민징용령의 제정을 통해서였다. 헌법에 근거한 기본적인 국적법은 적용하지 않으면서 전체주의 전쟁 수행을 위한 특별 입법조치들은 적용됐다.


1930년대말 황국신민화정책을 펼칠 때도 조선인에게 국적을 주지 않았다. 창씨개명과 국어(일본어)상용(常用)이 강제되면서 일본인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 친일파들도 있었겠지만 호적제도는 바뀐 적이 없다. “일제강점기 우리 선조들 국적은 일본이었다”라는 주장은 무지의 소치다.


출처 : 열린순창(https://www.ops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