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경남 사천시(삼천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유산으로 도박, 유흥, 술에 빠져서 사셨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일한 적이 없고요. 그래서 저는 13살부터 아르바이트하며 생계를 유지해갔습니다. 이게 어느 정도였냐면 제가 1987년생인데 학교 다닐 때 수업비라고 10만 원 미만의 돈을 내야 하는데 그걸 아빠가 국가에서 지원한 걸 술값으로 쓸 정도로 절 힘들게 했습니다.
촌이라 가정 폭력, 아동 학대당해서 맞다가 토하거나 말리던 할머님 손가락이 부러지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아버지의 도박요? 부둣가 커피숍 뒤에 있는 방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담배 연기가 가득한 곳에 저를 데려가서 도박을 구경하게 했습니다. 마를 갈아 만든 마차나 아이스티를 받아먹으며 어른들 도박하는 걸 봤죠, 초등학생이.
유흥은 어촌이라 몸을 파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커피숍도 그런 종류였는데 부둣가에 정다방(도박장이랑 다른 곳)에서 커피 주시는 누나들한테 가슴을 보이게 하고 저한테 만지라고 하기도 하고(초4), 그런 여자를 데려와서 제 옆에서 관계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술은 돌아가실 때 간경변, 뇌졸중, 위암, 대장암, 후두암 걸릴 정도로 술 담배를 좋아하셨습니다.
이런 가정에서 살면서 아르바이트해서 고3 때 학비 300만 원까지 벌어서 할머님에게 맡겨서 공립대학 4년제에 합격했습니다.
근데 제 삶이 더 지옥 같은 이유가 막내 고모 때문이었습니다.
그전에도 예고 가고 싶다고 하니 돈 많이 든다고 가지 못하게 하고(자기 아들은 예고 다님), 공고 간다고 하니 그래도 장손인데 인문계 가라고 하고, 아빠는 자기가 돈이 없고 고모한테도 돈을 받아 쓰는지 저의 인생을 고모 말대로 가게 하더군요.
대학 간다고 공부하고 돈 벌어놨더니 그 300만 원을 가져갔더군요. 그리고는 대학 가지 말라고 하더군요. 이게 뭐지 싶었지만, 어린 저는 무릎 꿇고 빌면서 그 돈 없으면 대학 못 간다고 울면서 빌었습니다. 국가 장학금이나 그런 건 잘 알지 못할 때여서 제가 번 돈이 전부였거든요. 이때 작은 어머님께서 자기 퇴직금이라도 받아 보내주신다고 했는데 아빠가 거절했습니다. 막내 고모가 보내지 말라고 했다고 돈 벌게 하라고. 그 대가인지 135,000원 치 자기 아들 사이즈에 맞는 옷(저는 183에 50킬로 사촌 형은 180 후반에 100킬로대) 사주고 50만 원 정도의 초콜릿 핸드폰을 사주더군요. 이럴 거면 왜 300만 원 가져갔지,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집에 있어야 하니 어디 갈 곳이 없으니 조용히 지냈습니다.
열심히 돈을 벌다가 성인이 되는 생일이 다가오던 며칠 전 제가 집에 있으면 할머니 아버지 수급비가 끊긴다고, 주소지를 옮겨야 하니 주소지를 구해주겠다고 하더군요. 생일 전날, 할머니한테 20일(월급날)에 생활비 드리고 용돈 10만 원 가지고 생활했는데 그 돈 가지고 나가라고 하더군요. 그날 고모한테 처음 맞았습니다. 아빠가 안 때리니 고모라니….
그래서 저는 가방 하나 들고 쫓겨나서 친구 할아버지가 하는 주유소에서 일하며 재수해서 수도권 4년제에 합격했습니다. 12시간 일하고 한 달에 이틀 쉬고, 달마다 용돈 드리고, 학교 합격하고 수업 들어야 하니 주유소 야간으로 바꾸고 12시간 근무 학업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아빠가 대장암이 걸리셨습니다. 영수증을 들이밀면서 비용을 내라던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지원되는 거라 고모가 드셨더군요. 저는 다시 돈이 없어 학교를 그만둬야 했습니다.
이때쯤 생계유지 곤란 감면(군 면제)을 받았지만, 21살에 받고 27살에 확정이 납니다.
왜냐구요? 탄원서를 받으면 조사가 들어오거든요. 고모는 이걸 무기처럼 사용했습니다.
돈을 벌다 보니 조금 돈을 모았다 싶으니 아빠가 빚이 있다며 돈을 갚으라고 하더군요.
결과적으로는 빚은 정말 있었고, 30살에 전부 갚았습니다. 어머니 유산이 2억(1997년)이었는데 그걸 홀랑 먹으면서 돈 쓰는 맛 들어 쓴 돈인지 도박에서 진 빚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산보단 큰돈을 20대 초반에 갚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제게 큰 스트레스가 됐습니다.
혼자 타지에서 사는 부담과 빚, 타지에 왜 살았냐고 물으신다면 고향에 가면 할머니 아버지 수급비 문제가 생긴다며 오지 말라고 난동을 부렸거든요. 고모가.
그러다 아빠가 뇌졸중에 걸린 날, 우연스럽게도 여자친구와….
아 돈도 없는데 여자친구를 어떻게 만났냐 하는 분이 많던데 가족도 없었고, 있는 만 못했는데 제가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욕심 없고 이런 저에게 고백하는 분이랑만 사귀었습니다,
여자친구와 고향 집을 보여주려고 내려갔을 때 아빠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길래 응급실 가자고 했지만, 거부하더군요. 자고 일어나면 괜찮다고.
다음 날 저는 작은 아빠, 막내 고모, 막내 고모부에게 린치당했습니다. 여자친구가 울면서 말리면서 ‘아버님이 괜찮다고 하셨어요.’ 하는데 여자친구도 치더군요. 이때도 반격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친지나 아빠 할머니를 때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죽으려면 죽었지. 당시에도 우울증이 심해서 반격도 방어도 안 하고 맞다가 여자친구가 맞으니 그걸 감쌌습니다. 그 덕분인지 여자친구랑은 그 후에도 일 년 더 사귀지만, 제 절친 1호랑 바람나서 헤어집니다. 제가 너무 가난해서인지 제 행복에 친구들이 쉽게 눈독을 들여서 이런 경우가 좀 있었습니다.
병원으로 가보니 아버지는 뇌출혈이 생기셨고, 저는 덤덤하게 외부 충격으로 인한 건가요? 하니까 그런 건 아니라고 의사 선생님이 얘기했지만, 고모는 계속 제가 때려서 그렇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리고 병실로 올라가자 아빠를 간병할 사람이 필요한데 간병비가 든다길래 그럼 제가 달마다 보내겠다고 하니. 아니 아들 된 도리로 네가 간병해야지 간병비 소리하고 있네? 하시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병동에서 제가 간병비를 달라고 했다며 욕을 하시다 사람들 시선이 모이니 뺨을 때리시더라고요. 당시 저는 맞아서 목 깁스를 한 상태였고, 친구가 해당 층 병동 근무자라 그 모습을 보고는 고모가 미친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일도 그만두고 아버지 움직이실 때까지 병간호했습니다. 당시에 거부하려고 했지만, 고모가 무기를 사용해서 군대에 관해 태클 걸지 않기로 하고, 그때 처음 알았는데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촌이고 막내딸이라 애정을 못 받아서 오빠들(아빠와 작은 아빠)이 잘돼서 도와주길 바랐는데 둘 다 일도 안 하고 살다 보니 자기가 그 화를 저한테 푸는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하시고 결혼하면 200만 원짜리 반지를 해준다고 하길래 이해하고 한 거였습니다. 저도 아빠 때문에 인생 난이도 헬모드로 올라간 상태였기에.
그러다 아버지가 움직이게 되자. 바로 군대 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집에서 다시 쫓겨나고, 서울 올라갔다가 우울증이 심해져서 일도 못 하다 지인들에게 문자를 돌려 저 좀 재워주실 분 하니 친한 형이 동생이 군대 가니 와서 지내라고 하셔서 부산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새롭게 시작하자 하고 좀 쉬다가 일을 구했습니다. 책을 좋아해서 서점에 일하면서 잘 지냈고 거기서 결혼하자는 사람도 있어서 결혼하기도 했습니다. 근데 결혼 상대가 문제였던 게 1,600만 원 연봉 받으면서 제가 모은 돈 다 까먹었습니다(혼자 해외여행, 치아 교정 등의 개인 비용). 이유는 프러포즈 이유와도 같았습니다. ‘자신이 뇌혈관 지병이 있어서 언제 쓰러질지 모른다. 그러니 결혼해 달라.’ 저는 그래도 여자친구니 그 말을 들어주었고, 할머니께 결혼한 모습 보여드리려고 식을 올립니다. 돈이 없으니 구청을 빌려서 가장 싸게 싸게 식을 올리고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밥도 못 살 정도였습니다. 상대는 친지들한테까지 밥을 대접하고 신혼여행도 싸게 제주도 가자길래 현명하다고 했는데 제주도 가는데 뭔 몇백을 쓰는지.
이런 결혼식이다 보니 봉투에 멘트를 적어 1만 원을 넣어서 오신 분들을 드렸습니다. 저는 사정이 이러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위에 말한 친지들한테 밥 대접하는 걸 보고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지만, 뭐 이미 늦었고. 당시 결혼 때문에 퇴직금으로 대학 보내준다던 작은 어머님이 절 미워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촌이다 보니 보수적인 생각과 가치가 있으니 그런 걸 이해할 수 없었던 거죠. 당시 막내 고모는 200만 원 반지 대신 축의금을 냈고, 자기가 제일 많이 냈다지만, 상대측의 최고 금액 10%도 안 됐고, 제 친구보다도 적게 냈습니다.
결혼은 10개월 만에 혼인 신고 안 해서 사실혼 파기가 되고, 이유는 제가 돈을 못 벌어 온다는 이유였습니다. 결혼 자금으로 5,600만 원 모아둔 돈을 10개월 만에 쓰고는 한다는 소리였습니다. 저는 또 가족을 잃는다는 생각에 이미 결혼에서 우울증이 심해 치료 중이었는데 상대가 죽으라는 말에 자살 시도를 했고, 상대는 제가 의식이 없는 틈에 커플링, 결혼반지, 통장 잔액을 다 털어가고 같이 일하던 서점 사람들에게도 제 욕을 하고 그게 돌고 커지더니 부산에서 첫 소중한 인맥 대부분을 잃었습니다. 웃긴 점은 붙어있는 문구점에서는 제가 일을 잘하는 걸 알아서 서점 다른 지점에서도 일하고 거기서도 평은 좋았습니다.
그렇게 파혼하고 같이 살던 집 보증금을 제 돈으로 했으니 준다더니 나중엔 그것도 상대 부모님이 와서 자신들이 준 돈이라고 하더군요. 도대체 1600 연봉인 사람이 거의 6,000만 원을 10개월 만에 어디 쓴 걸까요? 결혼식도 최소 비용으로 하고?
결혼이 끝나고 최근에 들은 소식에는 상대는 사경을 헤맨다고 합니다. 지병이 저랑 헤어진 후 일 년 만에 터져서.
문구에서 만난 여자친구랑 사귀고 대학도 다시 2년제 합격해서 전액 장학금으로 다니던 중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는 집을 저에게 주신다고 했지만, 유언장이 없으니 고모와 작은 아빠, 아빠가 7등분 해서 먹더군요. 얘 이렇게 가족이 많은데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조카가 우울증이 심해 자살 시도를 하고 고향에도 못 오고 떠도는데 군 문제 때문에 엄마 유산 쓰셨는지 물은 말 때문에 그거로 돈에 미친 놈이라고 막내 고모가 선동해서 다들 절 싫어하더군요. 지금도 여전하지만, 저는 21살 명절부터 용돈을 받은 적이 없고, 큰돈은 일하다 다쳐서 병원비 200만 원이 필요했는데 아픈 몸 이끌고 고향에 아빠한테 말하러 왔더니 막내 고모한테 말해 봐라. 막내 고모 일하는 곳 가요주점에 그때 한 번 갔는데 죽으라고 하더군요. 아빠는 그 말 전해 듣더니 죽으라고 말하고, 그래서 아빠나 할머니를 때릴 수 없으니 미쳐서 집 유리창을 깼습니다. 피 질질 흘리면서 돈이 없어서 약국가서 대충 처리하고 바로 올라갔습니다. 이후에 이 사건은 제가 집에 올 때마다 유리를 깼고, 막내 고모 가게에 번번이 찾아가 돈을 빌렸다고 하더군요. 전 태어나서 지금까지 막내 고모에게 축의금 말고 돈을 받은 역사가 20살 명절 이후에 없습니다. 다른 가족들도 똑같고, 100만 원에 죽으란 말 들었는데 누가 손을 벌립니까?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벌린 건데.
그래서 치료도 제대로 못 해 후유증 생기고 몸은 망가졌지만, N잡을 하면서 30살 여친과의 연애 3년 차에 돈을 다 갚고, 안식년을 가집니다. 17년 만에 쉼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절친 2호와 바람. 제가 가장 아플 짓을 다 해서 자살 시도를 하게 만들고 제가 의식이 없을 때 모두에게 절친과의 연애를 공개하더군요. 이것도 복잡한 얘기지만, 넘어가고.
당시부터 저는 심각한 자살중독(고위험군)이 돼서 집에 갇혀 살다가 차상위, 수급자 순으로 가난해집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게 지내는 와중에도 수급비 20만 원이라도 보내란 소리도 들을 때면 남을 때면 보냈습니다. 나가지도 않고, 술 담배 커피조차 사치라서 버릇 들이지 못해 돈 나갈 때가 거의 없어서 돈이 남았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빼앗기고 모아서 200만 원 3년 기다려서 영구 임대 아파트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서는 누수 사건을 겪고, 담당자의 허위 사실 고지로 엄청난 피해당하고 살 수가 없어서 서울로 지금은 이사 왔습니다.
아버지가 죽기 전 저는 녹음을 했습니다. 그동안에 제 행실에 문제가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녹음할 결심을 한 건, 아버지가 뇌사 상태가 돼서 병원에 누워있다고 오라고 하길래. 그전에도 죽는다면서 몇 번 돈을 빼앗긴 적이 있어서 확인하고 늦게 갔을 때였습니다.
이것도 개그입니다. 당시에도 해당 병원에 근무하는 친구가 있어서 물어보니 아버지가 진짜 뇌에 데미지도 입고 그래서 연명 치료할지 그리고 치료비는 어떻게 할지 물으니 친척들이 자신들이 보호자로 등록해놓고는 그제야 아들 있다고 저를 찾은 거였더라고요.
웃긴 건 내려가니 일어났습니다. 제가 내려가니 확인해 보니 그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었고, 아버지를 닮은 사람이라 쓰러질 당시에 주변인들이 저희 아버지 이름을 불러서 구급대원이 사실을 병원에 알렸고, 병원에도 아버지 아는 분이 많아서 아버
최고의 복수는 건강하게 잘사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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