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보배님들.
나이는 79년생인 짧지만 그래도 제가 살아온 인생을 얘기해 보려 합니다.
지금은 12살, 10살, 8살, 7살 4명의 아들들과
친구? 같은 (ㅋㅋ) 저
같은 놈 만나서 정말 고생이란 X고생은 다~ 격으며, (지금도 진행 중…) 함께 서로 의지하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와이프와 살고 있는 40대 중반의 아저씨 입니다.
이런 글을 올리려는 이유는 제 4명의 아이들 때문 입니다.
친가 쪽 / 친, 인척이
아무도 없다 보니 아이들이 “아빠는 왜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고모도 삼촌도 왜 아무도 없어?” 이런 질문이 시작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자세히 는 아니더라도 조심씩 이라도 설명은 하고 있지만, 아이들의
의아함과 아빠 쪽 가족이 없으면서 아이들도 아빠가 살아온 인생, 그리고 한쪽 가족의 구성원이 없는 이유
등 아이들에게 차차 모든 걸 설명 해야 할 때가 점점 오고 있는 시점에 이제는 헤어진 가족들을 찾아보아야 되지 않을까? 찾을 수 는 있을까? 란 생각에 이렇게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에피소드 내용은 지금 한번에 올리기보다는 / 어린시절(애기 때~초등학생때까지) / 청소년기 / 청년기 / 그리고 지금의 시절까지 나누어서 올려보려고 합니다.
긴 글이지만 재미삼아 그리고 제 사연에 조금이라도 알고 계신 분들은 관심있게 읽어 봐 주셨으면 합니다.
사실이냐?, 아니냐?, 는
아마도 저와 같은 시설에서 살아온 분들이 많이 계시고 여기 보배님 들 중에서도 계실 듯합니다.
Ep1 . 어린 시절(유아기~초등학생때까지)
저는 어렸을 적(4~5세) 아버지와
형, 할머니와 평범했던(어머니는 기억이 없음) 집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와 외출을 하다, 할머니 손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당시. 80년대초 거리에 보이는 어린아이들(보호자와 같이 없는)은 일단 납치하듯 잡아다가 시설로 무작정 보내져
버렸습니다.
그로인한 과거사 조사 대표적인 “선감학원 사건” “형재보육원 사건” 등 있었죠
그렇게 4~5세쯤(82~83년?) 저도 할머니 손을 놓치면서 거리에서 울다, 지쳐 쓰러진 저를 지역
경찰들의 의해 대방동 임시 아동보호소로 보내지게 되고 다시 서울 응암동 소재의 서울 시립 소년의 집(마리아
수녀회)보육원에 입소하게 됩니다.
당시. 서울 시립 소년의 집(마리아
수녀회)보육원은 원생만 3,500여명이 넘는 국내 최대 보육원이었습니다.
보육원 안에는 시립병원(도티병원) 정식축구장
크기의 운동장외 운동장만 4개, 수영장 3개(실내 수영장 1개소
별도), 초등학교(남, 녀
따로) 2개소 운영, 실내 농구장(천주교 재단이라 주말에는 예배소로 운영) 기숙사 남, 여(신생아 포함), 특수(장애, 및 불량학생)원생
이렇게 3개의 아파트형 기숙사운영
정말 지금도 생각하면 엄청난 규모의 보육원 이였습니다.
하루에도 저 같은 아이들이 최소10~20여명씩 계속 입소를 하였으니까요.
처음 보육원에 입소하고 저는 아직 미취학아동이라 유치부 같은 방에 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족과 떨어진 충격으로 실어증과 신장관련 질환에 걸렸습니다.
입소한지 얼마 안되 보육원내 있는 도티병원에 입원하여 신장재생술? 같은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1년 가까운 시간동안 저는 소변통을 달고 보육원내 병원에서
생활을 하면서 간호사님( 당시 간호사님들은 수녀님들이 많았습니다)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면서 실어증도 차츰 좋아지면서 이겨내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초등학생 나이가 되어 보육원내 초등학생반으로 기숙시설로 옮겨지면서 보육원내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초등반은 유치반하고 분위기나 생활 활동 자체가 달랐습니다.
유치반은 한방에 약 15~20명 남짓 한방에서 담담 수녀님(엄마라는 호칭으로 부름)과 같이 생활하지만, 초등반은 약3~40명이 한공간에서 생활 합니다.
한 층에는 1학년~6학년까지
6개반으로 모든 층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한 층에 평균 원생이 200여명 이상 생활합니다.
먼저, 하
절기, 동절기 기상시간은 다르지만, 지금은 하절기이기에 하
절기 기준 아침
6시 기상, 상급 학년부터 (각층에 화장실, 세면 실, 목욕탕
공용으로 1곳에 있음) 세면을 하면, 아침공부(보통 성경쓰기 / 예
창세기 몇 절부터~몇 절까지 쓰기),
7시 그리고 아침공부(숙제)확인 아침밥 먹기(숙제 안한사람은 밥 없음)
아침밥은 무조건 식빵(1학년 1쪽 / 2학년 1쪽 반 / 3학년 2쪽 / 4학년 2쪽 반 / 5학년 3쪽 / 6학년 4쪽)과 요 일별 딸기잼, 땅콩버터, 햄, 등 배식 받았습니다. 아~ 서울우유도 한 개씩은 매일 받았습니다.
식사 후 8시 반 등교 전교생 각 층당, 학년별 줄 맟쳐서 등교
오전 수업 후 12시 다시 줄 맟쳐서 기숙사 복귀 후 점심 식사
오후 1시 다시 등교
오후 수업 3시쯤 종료 후 기숙사 복귀(자유시간 있음)
고학년 (3학년부터) 은
식 자재 손질 해야함( 원생이 3500여명, 그래서 식당 아주머니, 봉사자 분들이 엄청난 식 자재 규모이므로
못함) 파, 양파, 마늘, 당근, 무, 등등 학년별
손질해야 하는 목표량이 있음
6시 저녁식사 (그 전에 TV시청 1시간~1시간반정도
함 당시 , 아톰 / 은하철도 999 /달려라 하니 /
미래소년
코난 / 개구리 왕눈이 / 꼬마 자동차 붕붕 / 빨강머리 앤 / 모래요정 바람돌이 / 등등 )
그리고 7시부터 학교 숙제(어쩔
때는 성경공부)
당시 2년부터는 천주교 12기도문 (성호경,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사도신경, 반서기도, 십계명, 삼덕송, 식사
전, 후 기도, 아침, 저녁
기도 등) 못 외우면, 밥 안줌. ㅋ ㅋ
9시 취침, 3~40명이
한곳에서 생활관안에서 자야 되니 생활관 반을 장롱과 수납장을 반을 가로로 배치해서 한쪽은 식사 및 생활장소 반대 쪽은 3층 침대 로 취침장으로 생활 했음
지금 생각하면 정말 닭장도 이런 닭장이 없었네요. .
저는 이렇게 초등반 시절을 잘~
보내지 모했습니다.
자주 헤어진 가족이 보고싶고 우울하고 가끔( 사실 자주 있지만 한반에 1년에 10명 이상)부모님들이
찾아와 아이들이 친구들이 부모님품으로 돌아갈 때는 아직 부모님이 찾아오지 못한 우리들은 그날 전부 부럽고 각자 자신들의 부모님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엉엉 울고 그랬었죠…
그렇게 저는 초등반 시절, 시설에서 못해도 5번 이상은 저도 부모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과 시설에서의 생활이 고되어 보육원 시설에서 도망 쳤습니다.
언제는 3년학때쯤 시설 뒷산을 통해 도망갔습니다.
하지만 뒷산은 저희 원생들이 자주 도망치는 명당 이라서 항상 기다리고 있던 인신매매 조직에 잡혀 6개원 이상 인신매매조직에서 앵벌이, 껌팔이, 소매치기, 공갈협박, 을
하면서 생활 했습니다.
저보다 큰형들이 작은 아이들이 도망 갈까봐 서로감시하며, 하루10~20만원을 못 벌면 밥은 커녕 폭력으로 그 하루 일당을 대신 했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배가 고파 하루는 가나초코렛, 아카시아껌을 팔며 가까운
파출소로 들어가서 시설에서 도망 나왔다고 스스로 자수를 해서 다시 보육원으로 들어간 적도 있었습니다.
다시 소년의 집 보육원으로 돌아가면, 담당 수녀님(엄마라고 호칭)한테 1층에
있는 체벌실에 가서 정확히 탁구채처럼 생긴 (탁구채보다 1.5배
컸음)것으로 팬티도 아닌 (팬티를 끌어올려서 티 팬티처럼
만듬) 맨살을 최소 20대이상 맞고 다시 원래 있던 반으로 배정받아 다시 단체 생활을 반복적으로 했습니다.
그렇게 더 몇번의 도망치고 또 잡히고 탁구채로 맞고 반복하다, 91~92년도 2월 경 6학년 졸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건강하지도 못해고, 병원생활과 도망을 많이 다녀 글도 못 깨우친.. 까막눈이라고 하죠.
졸업식도 졸업장도 못 받았습니다.
한해 250~300명정도가 졸업을 합니다.
서울 소년의 집은 신생아부터 6학년까지 보호하는 시설 입니다.(학년이 중요한 것이 아닌 나이가 13세가 되면 무조건 나가야 함)
그럼 나이가 찬 졸업생은 부산 소년의 집(지금은 부산알로이시오전자기계
중,고등학교)으로 보내 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졸업반 전체 중 약 5% 정도(10~15명) 미 적응자 또는 졸업장 못 받은 자는 다른 기술학교
같은 곳으로 보내 졌습니다.
저는 당시 졸업반 중 약 12명정도가 부산 소년의 집( 중, 고등학교)가 아닌
충주 산척면에 있는 마리스타 기술학교(지금은 마리스타 보호작업장 / 장애인보호시설로
바뀜)지금은 로 보내 졌습니다.
거기는 정말… 시골 중에서도 시골인 오지 같은 곳 이였습니다.
원생들은 여자는 없는 남자원생 80여명정도(13세~18세 미만) 있는
정말 동물의 왕국 같은 더 치열한 보육원 이였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글을 써 봤습니다.
아마도 제 가족들은 저를 아직도 찾고 있을까요… 아님 잊었을까요…
이제는 그리움보다는 원망도 아닌 지워져 가는 작은 추억 같은 꿈이라고 생각하는게 맞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이 하늘아래 같이 숨쉬고 살아가고 있을 가족과 또는 가까운 친척분들이나 먼 친척분들이라도 계시리라 생각
합니다.
저는 김정태란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서울 소년의 집이란 시설에서 확인 해보니 아버지 이름을 당시 적혀 있더군요.
김. 정. 환. 하지만 친형의 이름 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 이름 김. 정. 태
이지만 정확하지 않습니다.
호적을 16살에 만들어 졌으니까요.
그리고 제 태어난 년생 79년도 아닙니다.
호적을 16살 때 만들 때 호적 만들어 주신 분들이 실수로 제 태어난
년생을 81년도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2005년도쯤 KBS “헤어진
가족찾기” 프로그램에 나가 제가 있었던 시설과 과거를 조사해보니 제가 태어난 년도가 79년이 맞는 것 같다는 관계자분들의 의견으로 그 정보를 모아 방송에 출연 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아주 어릴 적 항구마을(서해쪽..더
정확히는 목포 같은 분위기) 같은 곳에서 살았던 희미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엄마란 사람은 가출한 것으로 기억하고요…
그래서 엄마란 사람의 가출 후 서울 (광화문을 바라본 기준 좌측편
동묘, 신설, 제기, 청량,회기, 외대등 ) 로 이사 한 것 같습니다.
가족과 헤어지기 전 당시 지하철역은 1호선밖에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할머니와 집에서 얼마 안되는 거리에 헤어진 장소가 지하철 역이였습니다.
제 어릴 적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습니다.
2005년 당시 방송출연때 KBS에
제출했던 서울 소년의 집 입소당시 찍었던 증명사진이 유일한데 방송국도 방송한지 너무 오래되어 당시 방송을 찾기 힘들고 사진은 잃어버리고 말았네요…
조금이나마 희망을 걸어보며, 보배드림이라는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 봅니다.
제 연락처는 safe6357@naver.com입니다.
혹시나 제 사연에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이나 아시는 분들께서는 작은 단서라도 좋습니다.
연락부탁드립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본인을 위해서
꼭 찾으시길 바라며
혹여 못 찾게 되시더라도
아이들이 좋지 않은 환경에도 건강한 삶을 살아오신
아빠를 이해,존경 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합니다
건승 하세요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