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북미 대결사를 북한의 관점에서 기술한다면, 그 결과는 이 책과 유사할지도 모른다. 논란이 많은 주제임에도, 에이브람스는 자신의 주장을 주석과 참고문헌으로 뒷받침하고 있어 그의 결론에 거부감이 생기는 이들이라도 신중하게 따져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존 에버라드, 2006-2008 북한 주재 영국 대사 겸 조정관
아브람스의 신간, ‘끝나지 않은 전쟁 : 북-미 대결 70년사’는 북에 대한 미국 측의 일반적 생각들이 대부분 잘못된 것임을 보여 준다.
북의 역대 정권이 사회주의적 방식으로 통치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합리적이고 때로는 현명한 정책을 채택해온 것 또한 사실이다. 그 덕분에 북은 전례 없이 강한 외부의 적대적 압박을 물리치고 상당한 정도의 군사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2017년 7월과 11월 사이에 북한은 3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한 개의 더욱 정교해지고 소형화된 수소핵탄두를 시험 발사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 실험으로 미국의 가장 오랜 적대국 중 하나가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 없이 입증되었으며, 그 후에 미 정보당국도 북의 핵탄두뿐만 아니라 실험발사 된 2개 유형의 ICBM 모두가 실전에 배치 가능함을 확인했다.
이제 북은 더 이상 군사적 약자가 아니며, 미국과의 오랜 전쟁에서 유리한 입지로 올라서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북의 인민은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22륜의 수직이동식발사대에 장착된 무명의 북 ICBM이 2020년 10월 북한 조선로동당 75주년 기념식을 축하하는 군사퍼레이드에서 전시중임
갈등의 뿌리
미국과 북한(조선) 사이의 갈등은 그 뿌리가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를 북한이 거부한다는 사실에 닿아 있다.
조선 건국의 아버지 김일성 주석은 탁월한 조선민족주의자 김형직과 강반석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소련의 극동지역에 배치되어, 일본의 식민지배에 저항한 만주빨치산들의 지도자였다.
일본은 1910년부터 1945년 사이의 식민지배 시기에 산업화를 추진하고 (전 세계에서 후버댐 다음으로 큰) 수풍댐을 건설했으며, 동시에 끔찍한 감시체제를 개발하여 정치적 반발을 억압했다.
미국은 남한에서 좌익민족주의 운동단체들에 대해 적대적이었고, 미군정을 실시했다는 측면에서 일제강점기와 다르지 않았다. 특히 당시 미군정청이 국가 기관들은 과거의 일제 하수인들에 의존하여 운영되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조선을 의도적으로 양분하고, 남한에는 이승만이 이끄는 종속 정권을 수립했다. 이승만은 수년의 추방 생활 끝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비행기를 타고 귀국했다.
당시 CIA보고서는 김일성과 이승만이 지도력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에서는 김일성 주석의 지도하에 산업생산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으며, 공장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83%나 증가했다. 성공적인 토지개혁으로 농부들 또한 새로운 기회를 가지게 되었으며, 많은 인민들이 국가보조를 받는 의료체계와 교육으로 혜택을 입었다.
반면에 이승만 정부는 남한 경제를 일본경제에 부속시키려는 경제정책으로 사회적 반발을 촉발했다. 미국이 일본을 재건하여 냉전체제의 하위동반자로 삼고자 했던 결과였다.
그 밖에도 일제협력자들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반대진영에 대한 불관용이 사회적 반발을 더욱 거세게 키웠다.
6.25전쟁의 공식적인 발발전 이승만 정부는 미국 군사정치고문관들의 지원하에 적어도 10만의 자국민을 살해했다. 남쪽 섬 제주도에서의 좌익폭동이 특히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1940년대 후반, 김일성 정부는 자유로운 선거를 통한 평화통일을 주창했다. 미국 정부는 김일성의 승리를 예상했기 때문에 선거를 반대했다.
비슷한 사례로 베트남을 들 수 있다. 1956년 당시 미국 정부는 호지명이 80% 이상의 득표로 승리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북 동시 선거를 무산시켰다.
미국은 민주주의에 대한 공약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주권을 짓밟았다. 당시 미국은 이미 태평양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과정에서 동남아시아를 군사기지들로 포위할 수 있었으며, 이 기지들을 발판삼아 이 지역에서 제국주의적 야망을 관철할 생각이었다.
6.25전쟁
북이 1950년 6월 25일 남한을 침략함으로써 6.25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공식화된 견해이다. 그러나 아브람스의 설명에서는 그 반대임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가 제시된다.
선거를 통해서는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이승만의 병력은 북으로의 침공을 감행했고, 그 시발점이 6월 25일 국경 도시 해주에 대한 공격이었다. 남한 측은 후일에 반격의 일환으로 해주를 공격했노라고 주장했지만, 이미 성공적으로 해주를 점령했다는 발표는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미국 정부관료들은 6.25전쟁의 발발 소식에 고무되었다.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Dcheson)은 “6.25전쟁이 때 맞춰 일어났고, 그래서 우리를 구해주었다”고 말했다.
▲딘 애치슨 Dean Dcheson(오른쪽)과 해리 트루먼 Harry S.Truman 미국 대통령(왼쪽)이 한국전을 계획하고 있다.
그밖에도 미국의 군부는 한국을 슈퍼바주카포, 네이팜탄, 젤리화된 개소린 등 새로운 무기체제를 시험하는 장소로 이용했다.
후에는 베트남이 동일한 목적을 위해 이용되었다.
북의 전쟁포로들은 의학용 실험쥐로 이용되었으며, 북 주민들을 상대로는 일본 전범들로부터 배운 세균전이 실험되었다.
일본전범들은 세계2차대전이 끝나고 메릴랜드의 미육군 생물전 본부에 비밀리에 초청받았고, 그 곳에서 강의했다.
일본제국주의를 상대로 전쟁을 이끈 경험이 있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살아있는 사람 중에 나만큼 유혈 낭자한 참상들을 많이 목격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6.25전쟁만큼 처참한 파괴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다. 내가 그곳에 있던 마지막 무렵에는 그 처참함에 위장이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후에 맥아더는 그 전쟁에 대해 “인간 역사에 절대로 기록된 적 없는 대살상극이었다”고 말했다.
전쟁이 끝난지 수십년 후에 설립된 진실위원회에 의하면 남한군이 북한군(조선인민군 KPA)보다 6배나 더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미군 병사들 또한 마을을 불 지르고 여자들을 강간하고 수십 건의 대량학살을 저질렀으며, 그중 일부는 순전히 인종적 편견에 의해 촉발된 것이었다.
▲1950년 여름 대전에서 미군의 감시 하에 저질러진 측결처형
전투기 조종사, 데이비드 타툼David Tatum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후에 우리를 공격할지 모르는 병사 한 명을 죽이기 위해 민간인 10명을 죽여야 했다면, 우리는 (그 학살을) 주저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북한에서의 미군만행을 소재로 한 신천박물관의 그림
전쟁 동안 북이 겪어야 했던 손실은 역사에 그 유례가 없을 정도였다. 적게 잡아도 북 인구의 20%가 사망했다. 미 공군이 북에 떨어뜨린 폭탄은 635,000톤 내지 698,000톤인데, 태평양전쟁 전기간 동안 일본 제국에 투하한 폭탄 503,000톤을 크게 넘어서는 많은 양이었다.
1950년 9월, 단 한 차례 신의주시에 가해진 폭격만으로 공공건물 3,017채 중에서 2,100채, 주책 11,000채 중에서 6,800채, 초등학교 17개 중에서 16개, 종교시설 17곳 중에서 15곳이 파괴되었다. 폭격에 의한 사망자 중에 80%가 여성과 어린이였고, 생존자들은 지하동굴에서 살아야 했다. 공격은 소이탄(incendiary bomb)으로 시작되었고, 뒤따라 폭탄이 사용되었으며, 마지막으로 구조작업을 방해하는 시한폭탄이 사용되었는데, 그 목적은 순전히 사상자의 수를 극대화하자는 것이었다.
전에 도쿄 폭격을 지휘했던 에미트 오도넬Emmet O’Donnell 장군은 “전쟁 발발 3개월 만에 한반도 거의 전역이 끔찍한 폐허로 바뀌었다. 공습의 결과로 거의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이름값 할 만한 어떤 것도 서 있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1953년 미 공군은 압록강 관계댐들을 공격목표로 삼았다. 그 결과 수많은 마을들이 통째로 그리고 조선의 넓은 곡창지대가 수장되었다. 특히, 이곳의 쌀은 이미 영양실조에 걸려있는 주민들이 목숨을 연명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한 보고서는 “서양 사람들은 이 주곡의 손실이 그곳 아시아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굶주림과 서서히 찾아오는 죽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6.25전쟁이 불러온 공포를 압축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6.25전쟁은 이 나라에 38선이라는 영구분단선을 남기고 휴전상태로 끝이 났다.
후에 미군의 군지휘관들은 중국과 북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했음을 시인했고, 특히 맥아더는 북 인민들에 대해 “강인한 적이고 통솔력 있는 적”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오늘날 북 인민들은 한국전을 위대한 조국해방전쟁, 승리한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이 전쟁의 결과 김일성 주석은 정통성을 더욱 견고히 할 수 있었다. 반면, 미국에서는 6.25전쟁이 망각 속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주된 이유는 이 전쟁이 미국의 정의로운 자화상에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다.
▲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을 기념하는 평양의 기념비
전쟁은 계속된다
6.25전쟁이 끝난 후의 미국 정보보고서들은 이승만 정부가 북에 대한 또 한 차례의 공격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으며, 미국은 이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수소폭탄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1957년 8월 9일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국가 안전 보장 회의(NSC) s702/2 보고서를 통해, 남한군의 북에 대한 일방적인 선제공격을 허락했고 미군의 지원을 약속했다.
1958년 1월경 미국은 남한내 네 개의 군사 기지에 대략 150개의 핵탄두를 분산 배치했다. 이에 자극받은 북측은 소련의 협력하에 자체의 핵개발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 1968년 푸에블로호 피랍 당시 체포된 미군
1968년 북한군이 미 해군의 감시선 U.S.S. 푸에블로호를 나포하자 긴장이 끓어 넘쳤다. 북베트남은 이 사건이 있은 지 불과 일주일 후에 미군에 대한 ‘구정 대공세’를 개시했다. 일각에서는 푸에블로호 나포와 ‘구정 대공세’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그 후의 통신들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펜타곤은 이 사건에 관한 미국 측 요구를 평양이 수용하도록 하기 위해 핵무기의 사용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이 한국전 휴전협정 당시 유리한 위치에 서기위해 핵무기 사용을 협박했던 사례와 아주 흡사하다.
1969년 미해군 비행기가 북측 영공에 침투했다가 일본영해에서 북측 미그-21에 의해 격추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에 미 대통령 리차드 닉슨이 격분한 상태에서 핵공격을 승인했고, CIA 요원 조지 카버Gorge Carver에 의하면 군부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다행히 좀 더 냉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했다. 그러나 긴장된 군사적 대치가 계속되었고, 그 와중에서 핵전쟁 위협이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대리전쟁
핵전쟁 위협이 증가하는 가운데 북-미 간의 갈등은 대리전쟁을 초래했다. 예를 들어 북은 베트남으로 조종사들을 파견했고, 이들은 베트남 인민군 공군을 위하여 공중 방위 임무를 수행했다. 14명의 북 조종사들이 사망했다.
베트남 전 국방부 차관이자 베트남전쟁 당시 조종사였던 쩐 탄 히엔Tran Hanh은 “우리는 북한 조종사들이 굉장히 용감한 사람들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국가적 자존심이 아주 높았고..., 무엇도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국의 공중공격으로부터 베트남을 방어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던 북 조종사들
보도에 의하면, 김일성 주석은 1965년 중국 대표와의 회견에서 베트남 인민들의 투쟁을 돕는 일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그는 “미제국주의자들이 베트남에서 굴복하면 아시아에서도 무너질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전쟁이 우리의 전쟁이라는 생각에서 베트남 인민들을 돕고 있다. 베트남의 요청이 있으면, 우리는 우리 일을 내팽개치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노력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베트남 전쟁 중 호치민 주석을 만난 김일성 주석
다수의 보고서에 의하면 북한군 병력은 북베트남군과 함께 지상전에 참여했으며, 조선인민군 심리전 전문가들이 북베트남군을 도왔다는 것이다. 김일성 주석은 베트남 지도자들과의 대화중에 진지화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동굴을 파고 공장들을 그 안에 숨기라고 조언했다.
김일성 주석은 1967년의 6일 전쟁 후에 이집트를 경제적, 군사적으로 지원했으며, 미국이 적극적으로 이스라엘 측을 지원한 1973년의 욤키푸르 전쟁에서도 원조를 제공했다.
그밖에도 1970년대 후반 조선인민군 1500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쿠바 지원하의 앙골라 인민해방군을 훈련시켰고, 고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아프리카 국민회의(ANC)와 나미비아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SWAPO) 해방군, 그리고 미국 제재의 표적이 된 짐바브웨 로버트 무가베(Robert Mugabe) 정부를 지원했다.
1982년 북은 이스라엘이 미국 후원하에 레바논을 공격했을 때 레바논의 방위에 기여했으며, 헤즈볼라가 지하무기고와 벙커, 그리고 통신망을 구축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지하시설은 2006년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간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목적을 무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후 북한은 이란과 (2011년 카다피 붕괴 이전의) 리비아가 핵기술을 개발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미국이 바샤르 알아사드(Basharal-Assad)를 축출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자 특수부대를 파견하여 미국 후원하의 지하디Jihadi군과 전투했다.
(하략)
http://www.minplus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678
특히 해주 이승만정부가 먼저공격해서 발발한 625는 믿기 어렵네요
먼저 공격했다고????
전방 병력들도 주말외출 보내고???
선빵첫는데 개전초에 수도까지 광속으로 밀린게 말이 됨????
침략을 결심했을땐 그 보복으로 처자식까지 몰살당할 각오를 하는거다.
추호도 침략자를 동정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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