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레이둔 알리 마잔다라니 (Fereidoun Ali-Mazandarani : 1951년 10월 3일~ )
1. 유년기
1951년 10월 3일에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태어난 페레이둔 알리 마잔다라니는 군인 가정에서 자랐다. 1960년, 국왕 샤의 근위대에서 장교로 복무하던 그의 아버지는 병과와 관련된 교육을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났다. 우리 나이로 치면 초등학교 2학년 밖에 안된 어린 소년 알리는 먼 길을 떠나는 아버지를 배웅하기 위해 공항까지 따라갔다. 테헤란 메흐라바드 공항에서 아버지를 배웅하던 소년은 드넓은 활주로에서 뜨고 내리는 비행기를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고, 그 우아한 자태와 엔진이 빚어내는 굉음까지도 소년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이듬해 10살이 된 소년 알리였지만 비행기에 관한 관심은 더욱 깊어만 갔다. 페레이둔의 가족들은 수업을 마친 그가 공항 터미널로 가서 몇 시간 동안 창가에 앉아 이착륙하는 다양한 비행기들을 보다가 혼자 집에 돌아오기가 일쑤였다고 회상한다. 아직 어린 소년이었지만 알리 마잔다라니는 그 공항에서 봤던 제트기들을 조종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을 굳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알리는 이란 호마 항공의 입사 시험을 치렀고 보기 좋게 합격했다. 그가 항공기에 반쯤 미친 것을 알고 있던 친구들은 그에게 이란 왕립공군에 장교 시험을 치르라고 권했는데, 공군사관생도가 되기 위한 시험과 엄격한 심사 과정들은 민간 항공사에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고 한다. 다행히 이란 공군에는 학과 성적을 만족하는 동시에 까다로운 정밀 신체검사에 통과한 지원자에 한해 편입을 허가해주는 시험 제도가 있었는데, 알리 마잔다라니는 거기에 합격한 몇 안 되는 학생 중 하나였다. 군인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이란 왕립공군 사관학교 학적부에 등록할 자격을 얻게 되었다.
2. 초기 조종사 경력
1971년 11월 22일, 알리 마잔다라니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공군에 입대하게 되었고, 1년 후인 1972년 12월에 UPT(Undergraduate Pilot Training) 과정을 수료하고 공군의 꽃이라 불리는 전투기 조종사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보내졌다. 그는 텍사스주의 락랜드 공군기지에서 영어 및 교신 훈련을 마친 다음 1973년부터 초등훈련기인 세스나 T-41로 훈련받기 위해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의 메디나 공군기지로 파견된 첫 이란 조종사들 중 하나였다.
이후 고급 조종교육을 받기 위해 러플린 기지로 보내진 그는 세스나 T-37과 노스롭 T-38 탤론을 타면서 처음으로 제트기롤 몰게 된다. 그를 가르친 교관 중에는 베트남에서 F-4 팬텀으로 싸운 참전용사이자 미 공군 최고의 조종사 중 하나인 켈리(Kelly Francis Cook) 대위가 있었는데, 그는 북베트남 상공에서 지대공 미사일에 격추되어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여 구사일생으로 귀환한 베테랑이기도 했다. 훈련 기간 동안 켈리 대위는 지정된 강의 내용 외에도 실전 상황에서 도움이 될 것들을 가르치려고 노력했고, 마잔다라니가 이때 배운 것들은 나중에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그는 1973년 12월 7일에 T-37로 첫 솔로 비행에 나섰지만, 그 시도는 비상 착륙이란 뜻밖의 결과를 낳았다. 러플린 기지의 지휘관이었던 해리 폴스(Harry Falls Jr.) 대령의 회고에 따르면, 그 젊은 이란 생도는 착륙을 위해 랜딩기어를 펼쳤는데 오른쪽 다리가 나오지 않았다. 반복해서 시도했지만 바퀴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그는 가장 위험한 착륙 상태인 외다리 불시착을 시도했고, 기적적으로 손끝 하나 다치지 않고 반파된 기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알리 생도는 경험이 많은 팬텀 조종사인 밥 스웨인(Robert R. Swain) 대위와 마크 브록랜드(Mark Blockland) 중위의 가르침을 받으며 T-38로 훈련을 계속했다. 페레이둔 알리 마잔다라니 생도의 마무리 훈련은 숙련된 F-4 비행대대장이자 뛰어난 비행 교관까지 도와주었고, 그는 1974년 11월 1일에 빛나는 조종사 기장을 달고 이란으로 돌아왔다.
고국에 돌아온 그는 메흐라바드 공항에 전개해 있는 제1전투비행단 예하 제11전술정찰비행대에서 노스롭 F-5A와 F-5B 비행학교의 개교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고, 1975년 1월에는 이란 서부의 데즈풀 전진 기지에 주둔하고 있던 제4전투비행단 제41전투비행대대로 떠났다. 1975년 6월, 그는 F-5A와 B형에서 모든 전술 훈련을 마치고 첫 자대인 제42전술전투비행대로 옮겼다. 1975년 10월, 그는 미국으로부터 새로 구입한 노스롭 F-5E/F로 갈아타고 제43훈련비행대대와 함께 전술훈련 과정을 마친 다음 다시 제42비행대대로 복귀했다.
러플린 기지에서 탤론으로 훈련받는 마잔다라니 (1973년)
작은 키는 전투기 조종사의 경우 급기동시 걸리는 고중력에 버티기 유리하다.
3. 세계 최강의 전투기
1977년 11월, 아직 새파란 중위였던 그는 F-5 타이거 II로 815시간을 비행한 어엿한 중견 조종사가 되어 있었다. 그 무렵 이란 공군은 당시 가장 진보된 최첨단 전투기인 그루먼 F-14A 톰캣의 조종사 후보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알리 마잔다라니는 최신예 전투기 톰캣의 전환 훈련을 위해 이스파한에 차려진 제8전술전투비행단 예하 제81훈련중대로 편입되었다. 그는 미국인과 이란 교관의 지도 아래 훈련을 받기 시작했고, 압바스 하진(Abbas Hazin : 2킬+) 대위와 함께 첫 비행을 했다. 압바스 대위는 1차 이란-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던 파일럿 중 하나로 이라크 공군기를 격추시킨 역전의 베테랑이었다. 그루먼 전투기를 점검하고 정비 교육하기 위해 파견된 몇몇 미국인들은 그 무렵 이스파한에 국왕이 제공한 수영장이 딸린 고급 주택가에 살고 있었다.3 또한, 미 해군이 직접 골라 보내준 교관들은 F-14를 제 몸처럼 다루는 현역 미 해군 최고의 조종사들이었다.
당시 이란 공군에 대한 톰캣 훈련은 전임 해군 제독 척 찰스(Charles Robert Larson)의 감독하에 국왕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진행되었다. 또한 톰캣을 개발하는 동안 테스트 파일럿을 맡기도 했던 대니 유잉(Danny Ewing Jr.) 소령도 이스파한 기지에 방문했는데, 젊은 중위 알리 마잔다라니는 그와 함께 두 번 비행하는 영광을 누렸고 유잉 소령은 이란 조종사에게 공중지배 전투기란 어떤 것인지 톰캣의 진정한 능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알리 중위의 비행에 대한 열정과 배움에 대한 갈망을 느낀 유잉은 이 웅장한 새를 조종하는 동안 그가 시험하고 경험했던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가르쳤다. 유잉 소령이 그때 전해준 기동과 능력은 F-14 교범이나 강의 요강에는 없는 것들이었으며, 유잉은 알리 중위가 두려움 없이 조종하도록 격려했다. 그의 귀중한 가르침은 정비 책임자 홀름버그의 가르침과 함께, 훗날 실전에서 적기와의 전투 뿐만 아니라 그가 탄 전투기를 구하는데 여러 차례 도움을 주었다. 알리 마잔다라니 중위는 1978년 6월 14일에 F-14 전술훈련을 마칠 수 있었다. 이 젊은 조종사가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될 무렵 F-14로 쌓은 비행시간은 110회 / 170시간에 달했다.
1979년 초, 이란 국민들이 정부와 군부 내의 혼란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켰을 때, 마잔다라니 중위를 포함한 F-14 조종사는 직접 소총을 꼬나들고 귀중한 전투기와 예비 부품들을 분노한 폭도들로부터 보호해야만 했다. 그 무렵 톰캣 비행대가 둥지로 삼고 있던 카타미 공군기지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조종사들과 미국인 엔지니어들은 회교 혁명으로 샤 정권이 무너지기 몇 주 전에 이란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갔다.
https://tv.naver.com/v/27330209
4. 혁명으로 망가지는 이란 공군
1979년 2월 11일, 팔라비 왕조가 통치하던 왕정국가였던 이란은 이슬람 근본주의자인 아야톨라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회교율법을 국가의 근간으로 삼는 신정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국가가 송두리째 뒤집힌 이 시기, F-14 비행대는 1980년 9월 22일까지 다른 공군기지들과 마찬가지로 혁명 뒤 이어진 혼란으로 인해 비행훈련조차 자신들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이란의 모든 정권을 손아귀에 쥔 호메이니는 5월 5일에 이슬람 혁명수비대(IRGC)를 창설했고, 그들은 과거 왕정 시대에 비밀경찰이던 사바크(SAVAK)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다음 조종사 중에서도 반혁명파를 이잡듯 골라내 숙청하기 시작했다.
혁명에 찬동했더라도 진보적인 성향을 지녔거나 혹은 극히 일부의 회교도가 아닌 조종사들은 모조리 체포되어 어디론가 끌려갔고, 이제 모든 공군기지에는 감찰관 역할을 하도록 정치 지도자들이 파견되었다. 이스파한과 카타미 기지는 특히 이란 공군 최고의 정예인 톰캣 파일럿들이 모인 곳이었기 때문에 사정의 칼날을 피할 길이 없었다. 곧 톰캣의 둥지는 이란 공군을 통틀어 가장 정치적인 군사 기지로 만들 이맘들과 온갖 정치 단체들로 가득 찼고, 당연히 이런 운영은 기술군인 공군과는 상극인 바람직하지 않은 조치였다. 그런 혼란 속에서 환멸을 느낀 선임 중대인 제1비행중대장 알리 마잔다라니 중위는 공군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1980년 9월 9일에 그가 다른 2명의 톰캣 파일럿과 함께 사표를 써내자 기지 사령관 후세인 사데그푸르(Hossein Sadeghpour) 중령은 극구 뜯어말리며 머리나 식히고 오라며 휴가를 주면서 여행 허가증을 써줬다. 같은 날 밤 새벽 3시 늦게 짐을 싸기 위해 제8전투비행단 기지 숙소에 돌아온 그는 공군에 계속 머물러 줄것을 요청하는 주민들의 편지를 발견했고, 결국 그는 그날 당장 군을 떠나려던 생각을 잠시 미뤘다.
마침 인접국 이라크의 미심쩍은 동향 때문에 장시간 초계 비행이 잦아지게 되었고 야간 비행도 일상처럼 되자 전투기들에게 공중급유의 필요성이 높아졌지만, F-14의 야간 공중급유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이라크가 도발하기 전에 시라즈(Shiraz)의 제7전투비행단 예하 제72비행대대가 이런 초계 비행을 담당했지만, 1980년 9월 14일부터 알리 마잔다라니와 WSO 모하마드 하셈 알레-아그하(Mohammad Hashem Ale-Agha / 3킬) 소령이 탄 F-14가 제1비행중대장기가 되었다. 이 시기의 알리 마잔다라니는 야간 스크램블 임무를 나갔다가 드디어 야간 공중급유를 받는데 성공했지만 이것은 원래 비행계획에 없던데다 허가받은 임무가 아니었다. 기지에 착륙하자마자 모하마드 소령과 함께 지휘실로 소환된 그는 기지 사령관 사데그푸르 중령으로부터 표준 비행 규정에 반하는 조치를 취한 것에 대하여 질책을 받았다. 하지만 그 무렵 호메이니에 의해 공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자바드 파쿠리(Javad Fakoori) 대령은 이 사건을 보고받고는 즉시 이스파한 기지에 있는 모든 톰캣 조종사들에게 야간 급유 능력을 점검하도록 명령했다. 이 조치로 인해 그들은 전쟁이 나기 전까지 프로브 방식과 드로그 접촉 모두 40회의 급유를 연습할 수 있었다.
샤흐람 로스타미 소령은 1발의 피닉스 미사일로 적기 3대를 동시에 격추한 에이스였다.
1980년 9월 22일, 인접 국가인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이란이 회교 혁명의 혼란에 빠지자,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을 때려잡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영토를 빼앗을 기회로 판단하고 전쟁을 일으켰다. 이라크 공군기들이 이란 서부 국경과 가까운 마을과 도시들을 폭격하는 한편, 국경 지대에서는 이미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선임 조종사 샤흐람 로스타미(Shahram Rostami : 6킬) 소령과 함께 사령부에 도착하자마자, 기지 사령관 사데그푸르 중령의 명령을 받아 출격 준비를 서둘렀다. 이들의 첫 임무는 국경 지대를 폭격하는 이라크 공군기지들을 파괴하기 위해 출동하는 F-4 팬텀 전폭기들을 엄호하는 것이었다. 술탄 작전이라 불린 그 임무는 적국인 이라크 영토 깊숙히 찔러들어가 수행될 것이며, 전 폭격 항정 동안 3면에서 적기들이 달려들어 조우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한시도 안심할 수 없었다.
사실 알리 마잔다라니 중위는 날이 밝기 직전까지도 전역 요청서를 손에 들고 최종 승인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스크램블 요청에 2중대장 레자 벤자바드 탈레비(Reza BenJavad Talebi) 대위와 함께 이스파한 기지의 활주로에서 이륙했다. 편대장 로스타미 소령은 이륙하기 위해 후연기를 켠 TF30 터보팬 엔진에서 갑자기 압축기 실속(stagnation stalling)이 발생하여 알리 마잔다라니의 F-14가 유일한 엄호기로 남게 되었다. 마잔다리니 중위가 서쪽으로 고도를 높이는 동안, 헬멧의 리시버에는 국경을 넘고 있는 이라크 지상군 상황에 관한 보고가 단속적으로 수신되었다. 알리의 톰캣이 작전 고도에 도달하자 공습부대의 지휘권이 이스파한 관제소에서 합동참모본부로 넘겨졌다. 그의 전역 요청서는 지휘관의 서명도 승인도 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제 그는 고작 십 수명 밖에 남지 않은 알리캣 파일럿으로 조국의 하늘을 지켜야만 했다.
5. 피닉스의 첫 격추와 개싸움에 빠진 톰캣
3일 후, 캐노피 프레임에 페레이둔 알리 마잔다라니의 콜사인 "페리(Ferry)"가 그려넣어진 F-14A는 2중대의 WSO 가셈 술타니(Ghasem Sultani) 중위를 후방석에 태우고 출격했다. 허공을 레이다파로 더듬으며 조사하던 그들은 60 km 이상 떨어진 위치에서 날고 있던 이라크 공군의 MiG-23 플로거 전투기를 포착한다. 알리 마잔다리니는 적기를 추격하기 위해 스로틀을 열고 후연기를 켜 속도를 높였다. 미그기의 뒤를 따라 11마일 거리까지 충분히 추격한 페레이둔 알리는 건 트리거를 당겨 장거리 공대공 미사일인 AIM-54 피닉스를 1발 발사했다. 런처에서 떨어져나간 뒤 곧장 튀어나간 피닉스 미사일은 잠시 흰 연기를 끌며 무서운 속도로 AN/AWG-9 안테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해 날아갔다. 불과 10여 초 뒤, 메흐란 상공에서 화광이 번쩍이며 산산조각난 적기의 잔해와 파편들이 검은 연기를 끌며 나풀나풀 떨어졌다.
"Splash One!"
이것은 피닉스 미사일이 실전에서 적기를 격파하기 위해 발사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9월 25일, 이번에는 2중대의 WSO 하산 나자피(Hassan Najafi)와 함께 출격한 마잔다라니는 고도 7,300m로 날면서 강력한 AWG-9 레이다의 추적 수색 모드(Track-While-Scan)를 이용해 하늘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이렇게 적기를 찾던 나자피 중위는 40 km 떨어진 곳에서 저공 비행하던 이라크 공군기 편대의 궤적을 발견했다. 톰캣의 장거리 레이다가 그들을 비추는 동안 나자피 중위는 IFF 분석을 통해 피아식별을 했지만, 그러는 사이에도 적기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계속 날고 있었다. 그 미그기들은 지면에 바짝 붙어 낮게 날고 있었기 때문에 이란군의 레이다 기지들은 아직 국경을 넘어 200 km 이상 파고든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적기임이 분명해지자 마잔다라니는 반사파가 뚜렷한 2기에 록온을 건 뒤 이번에는 피닉스 미사일 2발을 동시에 발사했다. 야수즈 상공을 100피트 고도로 낮게 날던 이라크 전투기 2대가 순식간에 격추되어 지면에 나뒹굴었다. 격추된 이라크 조종사 중 하나는 편대기가 갑자기 공중폭발해버리는 것을 보곤 재빨리 사출레버를 당기는 순간적인 판단을 내려 팔꿈치 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긴 했지만, 기체가 불덩이로 화하기 직전에 탈출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라크 공군의 MiG-23ML은 플로거 G로 명명된 개량형으로 연료 탱크를 하나 제거해 중량을 줄이고
착륙 장치와 가변익 프레임이 보강되었다. 사피르 레이다도 신형으로 교체되고 시리즈 처음으로 IRST를 갖추었다.
미그 설계국은 ML 타입의 전투 효율이 종래에 비해 20% 향상되었다고 주장했다.
알리 마잔다라니 선임 중위와 가셈 술타니 중위는 9월 30일에 이란 공군의 F-4E 팬텀 4대가 성공적으로 이라크의 오시라크 원자력 발전소를 폭격했을 때 국경에서 초계 비행을 하며 공습 편대와 거리를 두고 원거리 공중 엄호를 했다. 1980년 11월 13일, 그는 이번 전쟁에서 처음으로 격렬한 근접 공중전을 벌이게 된다. 이날 마주친 MiG-23은 그간의 이라크 파일럿들과는 달리 고도로 숙련된 베테랑이었음이 분명했다. 결국 헤드온 상태로 정면 대결을 벌이게 된 두 조종사는 7,300 m 고도에서 서로 총구를 겨누고 교차했다. 한 차례의 패스 뒤 두 조종사는 온힘을 다해 상대를 향해 기수를 돌렸고, - 샹델 기동 - 적기 또한 그를 죽이기 위해 급선회로 맞받아쳤다. 곧 두 전투기는 하늘에서 시저스 기동을 펼치며 교차를 반복했다. 마잔다라니 중위는 몇 년전 미국인 교관들에게 배운 대로 4개의 눈으로 사주경계를 했다. 두 전투기 모두 급선회를 반복하면서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점차 고도를 낮추고 있었고, 마잔다라니 중위는 후방석의 술타니 중위에게 적기의 위치와 현재 고도, 그밖의 주의 경보를 요청했다. 개싸움은 이제 가위 기동에서 코르크 스크류 기동까지 펼치다가 지상에서 90m 고도로 낮아질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을 만큼 낮게 날던 적기가 선회를 늦추는 순간 기회를 잡은 마잔다라니가 M61 벌컨을 짧게 점사했지만, 미그기에 탄 이라크 조종사 유세프 아마디(Yousef Ahmadi) 소령은 순간적으로 기체를 비틀며 20mm 포탄 세례를 교묘하게 피했다. 나중에 조사된 바에 의하면, 톰캣이 날린 회심의 일격에도 불구하고 미그기에는 겨우 포탄 2발만이 박혔을 뿐이었다. 그러나 고작 90미터도 안되는 저공에서 그런 순간적인 급기동을 펼친 댓가는 곧바로 되돌아왔다. 급선회하던 기체를 뒤집어 마잔다라니의 사격을 가뿐하게 피한 그 MiG-23은 뒤집힌 상태에서 지면에 처박히고 만 것이다. 사고는 너무나 순간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이라크 조종사는 피할 틈도 없었다. 오히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잔다라니 조차 하마터면 충돌할 뻔 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조종간을 당겨올린 그는 재빨리 고도를 회복하며 기체를 뒤집어 수평으로 안정시켰다. 온통 땀범벅이 된 채 기지로 돌아온 그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물론 전투기 조종사라면 누구나 꿈꾸는 개싸움에서 적기를 잡아냈으니 기쁘기도 했지만, 톰캣에 맞서 팽팽하게 싸운 그 이라크 조종사에게 존경심과 측은함을 금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마잔다라니 중위는 수색구조팀에게 격추된 이라크 조종사의 신원을 확인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정보장교의 분석에 따르면 죽은 미그기 파일럿은 알쇼이비에 기지의 비행대 지휘관이었다.
11월 30일, 알리 마잔다라니는 페르시아만 지역으로 출격을 나갔다. 그 임무에서 톰캣은 후방석에 탄 에브라힘 안사린(Ebrahim Ansareen) 소위가 AWG-9 레이다를 이용해 조기경보기 역할을 하고 있었고, 마침내 100 km 이상 떨어진 코르모사 상공에서 적기의 활동을 포착했다. 이윽고 2발의 피닉스 미사일이 발사됐고, 그 죽음의 창은 페르시아만을 곧바로 가로질러 이라크 전투기 2대를 정통으로 꿰뚫었다. 1981년 4월 24일에는 모하메드 파로크나자르(Mohammad Farrokhnazar) 소위와 함께 또 1대의 기종 불명 이라크 전투기를 격추시켰다. 해가 바뀐 1984년 2월, 마잔다라니는 드디어 톰캣의 고정무장인 M61 벌컨을 제대로 써먹을 기회를 갖게 된다. 세자바르 쇼쿠(Sezavar Shokouh) 소위를 WSO로 태우고 나갔던 마잔다라니는 부비안 섬 북동쪽에서 미라주 F1과 근접 교전 끝에 기총으로 격추시키는 쾌거를 이뤄냈다. 이 전투를 끝으로 이라크 공군은 톰캣을 상대로 교전을 벌이는 상황을 적극 회피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근 1년 동안이나 페르시아만의 하늘은 조용해지는 것 같았다.
6. 13대1의 공중전
이듬해인 1985년 3월 24일, 마잔다라니와 압바스 사나트카르(Abbas Sanatkar) 소위는 초계비행을 하다 연료가 빙고 수준까지 떨어졌을 때 긴급 명령을 수신했다. 페르시아만 하르크 섬 옆에 정박해 있는 이란 유조선들에게 접근하고 있는 13대의 이라크 공군기를 막아내라는 것이었다. 13대1로 싸우라는 그 명령은 거의 자살 임무와도 같았다. 게다가 상대는 공중전 능력이 없는 폭격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민첩한 닷소 미라주 F1과 톰캣과 같은 가변익을 가진 MiG-27도 섞여 있었던 것이다. 수적으로 심각한 열세에다 연료까지 부족했던 톰캣이었지만 외롭게 적 편대를 향해 날아갔다. 압바스 소위가 레이다파의 분해능력을 높이도록 펄스 단일목표 추적 모드(Pulse-Single-Target-Tracking)로 바꿔 조사하자, 이라크 공습 편대는 해면고도 15m라는 초저공으로 접근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란 관제소가 그 적기들을 놓친 것은 당연했다.
거리가 좁혀지자 이제 동시다목표 공격이 가능해졌다. 압바스 소위가 이번에는 레이다를 추적 수색 모드로 바꿔 원거리에서 4개의 목표를 록온했다. 마잔다라니가 "폭스 3!"를 외치며 트리거를 당기자 동체 밑에서 묵직한 피닉스 미사일이 연달아 발사되는 진동이 전해졌다. 발사된 AIM-54는 마치 목표를 향해 마하 5로 돌진하는 전투기 편대와 같았다. 피닉스 편대는 바다에 닿을 듯 말듯 낮게 날고 있던 이라크 편대에 파고들었고, 엄호 전투기 2대가 그대로 폭발해버렸다. 이에 놀란 폭격기들이 대함 무장을 버리며 대형을 깨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마잔다라니는 추격하고 싶어도 연료가 모자라 적기를 쫓을 수 없게 되자, 그들은 공중급유기에서 연료를 보급받기 위한 공역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라크 공군이 이란 유조선들을 급습하기 위해 출동시킨 13대의 전폭기 중에서 3대의 미라주 F1과 1대의 MiG-27이 귀환하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자본주의자 미국인들이 이란 측에 판매한 톰캣은 그야말로 무적이었고, 그것을 상대하는 이라크 공군에게는 하나의 넘지 못할 벽처럼 느껴졌다. 전쟁 동안 이라크는 이란의 F-14를 격추하기 위한 몇 가지 전술을 고안했다. 그중에서 효과가 있다고 여겨진 전술은 여러 대의 전투기를 집중시켜, 다른 방향에서 동시에 포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라크 공군은 프랑스 마트라 사에서 F-14를 사냥할 수 있다고 해서 구입한 레드 헤드(Red Head)로 알려진 슈페르 530(Super 530) 미사일을 미라주 F1EQ에서 연거푸 발사했다. 알리 마잔다라니가 경험 많은 WSO인 자바드 쇼크라이(Javad Shokraei) 소령을 태우고 연례적인 정기 점검을 겸해 하르크 섬 남서쪽으로 CAP 임무를 나갔을 때 바로 그런 공격을 받게 된다.
마트라 슈페르 530 미사일을 장착한 닷소 미라주 F1EQ는 이라크 공군의 하이엔드급 멀티롤 전투기였다.
- 하편으로 이어집니다 -
진짜 탑건 에이스는 미군이 아닌 이란사람 이었군요.
피닉스의 실전기록.. 다수를 상대로한 전투..
수직 시저스 기동까지한 격렬한 근접 공중전..
가변익을 가변익이 상대한 기록.
마잔다라니 이사람이 탑건이자 AREA88 에이스 진 이군요.
진짜 탑건 에이스는 미군이 아닌 이란사람 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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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잔다라니 이사람이 탑건이자 AREA88 에이스 진 이군요.
하편하편...ㅠㅠ
감사합니다!
제가 쓴 원문 주소 링크 걸어드리겠습니다
https://blog.naver.com/naljava69/222780426615
그런데 보배 게시판이 이상이 있는건지 하편이 미리저장만 되고 업로드가 안되네요 ㅠㅜ
추천드립니다.
GP03 팬입니다.
예전에 플래툰에서 연재 된 이란의 F-14 이야기를 재밌게 봤는데, 과월호라 드문드문 빠진채로 봤었죠.
그 빠진 내용 같아서 굉장히 궁금 해집니다.
급하시면 하단 링크에서 보시면 됩니다요;;;
https://blog.naver.com/naljava69/222780426615
https://blog.naver.com/naljava69/60066405057
https://blog.naver.com/naljava69/60067576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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