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코 바라카 백작 (Francesco Baracca : 1888년 5월 9일~1918년 6월 19일)
1. 성장기
1차 대전에 참전한 이탈리아인 중에서 가장 많은 적기를 격추시킨 에이스로 이름을 떨친 프란체스코 바라카(Francesco Baracca)는 이탈리아 북동부의 소도시 루고 디 로마냐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바라카는 플로렌스의 사립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초중등 교육을 받았고, 자라면서 장교가 되고 싶어진 바라카는 1907년 10월에 모데나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했다. 그는 병영과 다름 없는 규율에 얽매인 교내 생활의 돌출구를 찾아 승마에 몰두했고, 얼마 안가 그는 말이란 동물과 하나가 되는 승마광이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온 세계를 뒤져봐도 공군이 없었고, 반쯤 말에 미친 프란체스코 바라카 소위는 1910년에 명성 높은 피에몬테 레알 기병 연대에서 기병장교가 되었다. 좌우를 둘러봐도 모두 말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바라카 소위는 사냥과 승마를 마음껏 즐기며 때로는 로마에서 콘서트와 오페라를 관람하면서 문화 생활도 할 수 있었다.
1차 대전까지만 해도 야지에서는 자동차보다 말의 기동력이 확실히 앞섰다.
이탈리아 기병대 또한 느리지만 복장에서 위장 개념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음이 드러나는 사진.
아마 바라카 소위가 계속 이곳에서 근무했다면 1차 대전까지도 기병으로 참전했을 터지만, 운명은 그에게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육군 사령부로부터 그에게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마을로 가서 현지에 착임하여 보고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순간 그는 망했다고 느꼈다. 온통 풀밭으로 둘러싸인 그 곳은 비행장이었던 것이다. 바라카는 처음에는 실망했고 비행기란 물건도 낯설었지만, 내제된 모험심이 이번에는 그를 항공의 길로 이끌었다. 알고 보니 비행기란 참 신기한 탈것이었다. 여지껏 인간의 탈것은 말부터 자동차, 선박까지 모두 2차원의 평면에서 움직이는 이동 수단이었지만, 드넓은 하늘이란 3차원 공간을 누비는 비행기는 그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줬고, 이 젊은 장교는 곧 비행 그 자체에 열렬히 빠져들게 된다.
비행기가 인류 역사에 등장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10년대, 유럽 최고의 항공 선진국은 누가 뭐래도 프랑스였다. 조종 유학생 바라카 소위는 1912년 7월 9일에 프랑스의 랭스(Reims)에서 조종 면허를 따냈고 그 후 육군항공대가 창설된 본국으로 돌아가서 제2비행대대(II Battaglione Aviatori)에서 관측기 조종사로 복무했다. 중위가 된 1914년에는 제5스콰드릴리에(5 Squadriglie)와 제6스콰드릴리에(6 Squadriglie)를 차례로 복무했다.
이탈리아 육군항공대의 뉴폴 IV
2. 세계 대전
1914년 7월, 인류가 처음 겪은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본래 이탈리아 왕국은 1882년부터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손을 잡고 삼국 동맹을 맺고 있었으나 개전의 포문을 연 오-헝 제국을 지원하지 않고 겉으로는 중립을 표방하면서 판세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렇게 힘의 균형을 가늠하던 이탈리아는 1915년 5월 23일에 동맹을 깨고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에 뛰어들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탈리아 국내에서는 전쟁 찬성파와 평화파, 그리고 중립파 사이에서 격렬한 정치적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바라카는 개인적으로는 이 전쟁은 명분이 없다고 생각하며 중립을 지켰지만 그는 군인이었고 국가에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선전포고 직후에 그는 복좌기 숙달 훈련을 위해서 파리로 보내졌다가 7월에 복귀한 후, 제8스콰드릴리아(8a Squadriglia)에서 비무장 복좌 정찰기인 뉴폴 10(Nieuport 10 A.2)을 몰게 되었다.
"베베"라고 불린 프랑스 표준 단좌전투기
3. 정찰기 조종사
1차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교전국들의 항공 부대에는 전투기란 기종이 아예 없었으나 이 거대한 전쟁은 모든 비행기를 진화의 가속기에 태워버렸다. 그 결과 바라카 중위가 처음 실전에 타고 나간 뉴폴 10은 명백히 관측기로 취급될 수준까지 구식이 된 상태였다. 80마력 엔진을 한계까지 쥐어짜도 130 km/h가 고작이었고 상승력도 눈에 띄게 뒤져 경량기의 민첩함이란 장점이 퇴색한 구형 뉴폴은 오헝 제국의 단좌 전투기들과 맞서는 용도로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이에 실망한 이탈리아 조종사들은 조금이라도 성능을 끌어올리기 위해 관측수를 내리고 기총 1자루를 올려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이 구식기들은 드물게 공중전에 가세하는 경우엔 교란과 미끼 임무를 맡게 된다. 이런 상황은 바라카 중위가 1915년 12월 1일에 새롭게 전투기 부대로 창설된 제1전투비행대대(1a Squadriglia Caccia)로 옮겨갈 때까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참전 초기의 프란체스코 바라카가 뉴폴 11의 조종석에서 포즈를 잡았다.
신형 스패드 전투기를 수령한 바라카
4. 전투기로 바꿔타고 거둔 첫 승리
1916년 4월에 루이스 기관총 1정을 장착한 뉴폴 11(Nieuport 11) 단좌 전투기가 취역했고, 바라카 중위는 4월 7일에 이 신형 전투기를 몰면서 오스트리아제 한자-브란덴부르크(Hansa-Brandenburg C.I) 정찰기의 연료 탱크를 벌집으로 만들면서 첫 승리를 거뒀다. 이것은 그가 하늘에서 거둔 짜릿한 첫 승리였지만 또한 전쟁에서 이탈리아가 거둔 공중 격추 1호이기도 해서 그에게는 참전 초기부터 이탈리아 국민들의 눈이 쏠리게 된다. 사격과 승마로 단련된 그가 갈고 닦은 전투 센스는 바라카 중위로 하여금 첫 공중전에서 바로 가장 즐겨쓰는 전술을 확립하게 했다. 그것은 적기의 조종사와 후방 사수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후하방에서 권총을 쏴도 맞출 만한 가까운 근거리까지 달려들어 기관총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었다.
바라카 중위가 자신이 한때 소속되었던 기병 연대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탑승기 뉴폴 17(Nieuport 17)에 검은 말 마크를 그려넣은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는 이 마크를 가리켜 "하늘의 기병"라고 불렀다. 뉴폴 전투기를 몰던 그는 1917년 3월에는 고속 전투기로 명성을 높이고 있던 스패드(SPAD S.VII)로 갈아타고 1대를 단독 격추하고 또 1대는 다른 이탈리아 에이스와 협력하여 격추시켰다.
바라카의 두 번째 승리는 1916년 4월 23일 고리치아(Gorizia) 상공에서 거둔 오스트리아제 로흐너(Lohner L) 정찰 비행정이었다. 세 번째 격추를 달성한 뒤 그는 제70비행대대(70a Squadriglia)로 이적했다. 대위로 진급한 바라카는 1917년 5월 1일 "에이스 스쿼드론(Squadriglia degli Assi)"으로 새로 창설된 제91비행대대(91a Squadriglia)에서 9승을 거둘 때까지 남아있었다. 그 무렵, 이탈리아 국내에서는 승승장구하는 바라카 대위의 격추 전과는 안그래도 유명인이 된 그를 전국적인 저명인사로 만들었다. 바라카 대위는 원래 지상 근무에 얽매이기 보다는 하나라도 더 많은 적기를 격추시키고 싶어했다. 그는 자질구레한 행정 업무와 지휘에 따른 책임과 서류 더미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그는 대대 지휘관 보직에 적응해야만 했다.
이탈리아 육군항공대의 에이스 트리오 바라카 / 풀코 / 피에르
5. 하늘의 기사도
1917년 6월, 바라카의 친구이자 걸출한 비행 실력으로 정평이 난 에이스 풀코 루포 디 칼라브리아(Fulco Ruffo di Calabria : 1884~1946 / 20킬) 중위는 바라카 대위의 경력과 삶을 거의 끝장낼 뻔했다. 풀코 중위는 적기와 정면으로 마주치자 헤드온 패스를 지나친 뒤, 곧바로 임멜만 기동을 걸어 다시 적의 꼬리를 잡으려 했다. 상승 선회를 통해 얻은 고도를 속도로 바꾸기 위해 적기를 겨누고 급강하로 내려가던 그는 순간 작은 조각 구름을 꿰뚫었다. 몇 초 후 시야가 걷힌 그의 눈앞에는 바라카의 탑승기가 코 앞에 있었고 깜짝 놀란 풀코 중위는 조종간을 꺾어 간신히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구름에서 튀어나온 풀코 중위의 전투기가 구아아앙 바라카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임무를 마치고 기지로 돌아와 착륙한 풀코 중위는 직속 상관이자 친구인 바라카 대위에게 너무나 미안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자 바라카는 전우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큰 소리를 쳤다.
"이봐, 내 친구 풀코, 다음 번에도 나를 격추시키고 싶다면 오른쪽으로 몇 미터 앞을 겨냥하라고! 이제 그 얘긴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사신의 코앞까지 불려간 경험을 겪은 바라카 대위는 속도가 빠르고 강력한 무장을 갖춘 신형 스패드를 믿지 않게 되었고, 결국 기동성이 더 나은 구형 스패드 7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카는 스패드 13의 탁월한 속력과 급강하 성능을 아예 버릴 수는 없었는지, 수리가 끝나자 때때로 바꿔 타면서 출격했다.
무엇보다도 전투기 조종사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려고 애를 썼던 프란체스코 바라카는 1917년 11월에 소령으로 승진하자 지상에서 처리할 직무가 더욱 늘어난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그는 이륙하면 금새 적기를 만날 수 있는 전선 기지에서 떨어진 삶을 견디기 힘들어 했고, 그래서 전선 시찰이나 신참 교육 등을 핑계 삼아 91스콰드릴리아에 돌아가 출격하곤 했다. 이런 일화로 미루어보면 대개 바라카라는 사나이는 전공과 피에 굶주린 전투광처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하늘의 싸움에서 먼저 쓰러져간 전우들이나 부하들의 죽음에 예민했으며 심지어 패배한 적에게도 동정심을 베풀기를 마다하지 않은 순수한 인간미가 넘치는 사나이였다. 그는 자신에게 격추되어 불시착한 뒤 입원해있는 적기의 승무원들을 꼭꼭 찾아가 위문했고, 자기가 쏜 총탄에 희생된 조종사들의 무덤에 화환을 바치곤 했다. 바라카 소령은 1917년 말까지 자신의 격추 기록을 30대까지 끌어올렸다.
바라카는 1917년 10월에는 동조 기어가 딸린 기관총을 2정 갖춘 신형 전투기 스패드 13(Spad S.XIII)으로 갈아타 10월 22일에 두 차례 승리를 거뒀고, 10월 25일에는 피에르 피치오(Pier Ruggero Piccio : 1880~1965 / 24킬) 대위와의 합동 출격에서 또다시 격추 전과를 올렸다. 바라카 대위는 이번에도 승리했지만 이 교전에서 적기의 사격을 연거푸 얻어맞은 그는 죽을 수도 있었다. 그가 탄 전투기는 벌집이 되었고 조종석 바로 뒤에는 기총탄이 할퀸 탄흔이 선명했던 것이다. 그날 밤 바라카 대위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오늘 공중전에서 적기가 퍼붓는 기관총 세례에 내가 탄 스패드가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졌다. 이 전투기는 기회가 오면 단번에 적기를 떨굴 강력한 무장이 있지만 총탄 세례에서 벗어나기엔 둔했다. 제대로만 싸우면 기관총 한 자루면 충분하다."
6. 국왕이 아낀 조종사
해가 저물기 전에 바라카 소령과 피치오 대위, 그리고 풀코 대위는 새롭게 개발된 신형 전투기 안살도 A.1 발릴라(Ansaldo A.1 Balilla)의 평가를 맡게 된다. 바라카 소령은 당시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소환되어 밀라노의 오페라 극장에서 직접 황금무공훈장(Medaglia d'oro al valor militare)을 수여받았다. 국왕이 손수 목에 걸어주는 훈장을 받은 바라카 소령에게는 장기 휴가가 주어졌고 이탈리아 전국을 순회하며 지역 행사들에 참여했지만, 그에게는 이 모든 난리법석들이 통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그의 마음은 전선과 전우들에게 쏠려 있었다. 바라카 소령이 상관들에게 전선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확신시켜 다시 원대로 돌아간 것은 종전이 다가오고 있던 1918년 3월이었다. 2개월 만에 전선으로 돌아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난 10월 말에 겪었던 구사일생과 같은 상황을 다시 겪었다. 그가 지휘하는 비행대대는 4월 27일에 적 지상군이 목전에 다가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바라카 소령이 전설속의 동물 그리핀을 부대 휘장으로 선택한 것도 이때쯤이었다. 그의 부하들은 여전히 지휘관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뜀박질하는 종마를 고집했지만, 대부분의 조종사들은 새 마크를 그려넣었다.
7. 죽음
지휘 임무에 쫓긴 바라카 소령은 1918년에는 거의 실전 출격을 할 수 없었으나, 짬짬이 출동하는 과정에서 더 전과를 거둬 이제 34대를 격추시키고 있었다. 바라카는 6월 19일 몬테로 지역으로 지상군에 대한 기총소사 임무를 수행하러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이 날, 이탈리아군은 항공 전력의 우위를 이용하여 나무 꼭대기 높이로 낮게 날면서 지상 공격 임무에 전념했다. 그렇지만 식은 죽 먹기처럼 여겨지던 그 임무가 실은 공중전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것이 밝혀지는데는 몇 시간이면 충분했다. 많은 이탈리아 조종사들이 이 임무에서 지상에서 날아든 소총탄에 격추되거나 대공 사격에 피탄되어 전사하고 말았다.
오전 6시 30분에 지상군 지원 임무를 명령받은 바라카 소령과 신참 조종사 프랑코 오스나고(Franco Osnago) 대위는 지상으로부터 격렬한 대공 사격을 받고 서로 갈라졌다. 몇 분 후, 오스나고는 바라카 소령이 탄 스패드 VII이 불타며 추락하는 것을 목격했다. 다른 소식통에 따르면, 바라카는 오스나고가 적의 참호를 향해 기총을 쏘면서 급강하할 때 그의 후방을 엄호해주다가 피격당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오스나고는 편대장을 시야에서 놓쳤고, 주위를 선회하며 찾다가 근처 계곡에서 뭔가 불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며칠 뒤인 6월 24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퇴각한 후 바라카의 유해는 스패드 전투기의 불타다 남은 잔해에서 4 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어 수습됐다. 나중에 그를 추모하는 기념비가 그 자리에 세워졌다. 그의 마지막 임무를 함께 했던 오스나고 대위와 바라카의 부하 페루치오 란자(Ferruccio Ranza : 1892~1973 / 20킬) 중위, 그리고 전장을 취재하러 왔던 기자 1명이 영웅의 시신을 함께 수습했다.
그의 시신은 발견되었을 때 머리에 총알의 관통상이 분명한 치명상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집에서 권총이 빠져나와 있었기 때문에 바라카가 하늘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 불시착한 다음 포로로 잡히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닌가하는 의혹이 일었다. 얼마 후 오-헝 제국에서 발간된 일간지에서 한 조종사가 전투에서 바라카를 격추시켰다고 주장하는 기사가 실렸다. 그 주장은 격추 당시의 정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어느 정도 팩트를 뒷받침하고 있었지만, 이탈리아는 자신들이 가진 최고의 전투기 파일럿이 격추당했다는 것을 인정하면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염려하여 지상 포화에 맞았다고 보도했다.
오-헝군 조종사 막스 카우어(Max Kauer) 중위와 관측수 아르놀트 바르빅(Arnold Barwig) 소위의 증언에 따르면, 바라카 소령은 자신들이 탄 푀닉스 C.I(Ph?nix C.I) 복좌 정찰기를 위에서 공격했다가 실패하자 똑바로 꼬리에 달라붙어 재공격하려다가 기관총의 반격에 맞고 살해당했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비행 일지에 정확한 교전 시간과 장소를 기입했으며 휴대한 항공카메라로 추락한 스패드의 잔해를 사진까지 찍어 돌아왔으니 이탈리아 측의 주장은 프로파간다로 밝혀진 것이나 다름 없다.
8. 추모 열기
바라카의 전과 34대는 알려진 오-헝 제국군의 손실 기록과 이탈리아 측의 전투 보고서를 비교 대조해도 거의 대부분이 입증될 수 있으며, 이 이탈리아 조종사는 세계 대전 동안 가장 높은 전과를 거둔 연합군 조종사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전쟁이 끝난 후, 루고 디 로마냐에 있는 그의 집은 프란체스코 바라카 박물관으로 바뀌었는데, 이 박물관에는 격추된 비행기에서 가져온 방향타와 기관총 뿐만 아니라, 바라카 소령이 남긴 제복과 훈장 같은 다양한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쟁이 끝나고 몇 년이 흐른 뒤에 그가 죽기 전인 1917년 12월에 몰았던 스패드 VII이 발견되었고, 거의 골조만 남아있던 그 전투기는 이후 이탈리아 항공보존협회에 의해 복원되었다. 1921년부터는 그가 죽은 날에 바라카를 기념하는 바라카 컵(Coppa Baracca)이란 에어 레이싱 경기도 열려서 1922년과 1923년까지 이어졌다.
지금도 이탈리아의 많은 도로나 장소, 건물 등에 바라카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몇몇 공항, 공군 기지, 비행장들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으며, 바라카의 장례식이 거행된 고향 루고 디 로마냐 광장에는 베니토 무솔리니에 의해 거대한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몇 년 후, 바라카의 어머니는 아들의 상징이었던 날뛰는 말 - 카발리노 람판테(Cavallino Rampante) - 을 엔초 페라리(Enzo Anselmo Ferrari : 1898~1988)에게 선물했다. 그때부터 힘차게 앞다리를 들고 푸레질하는 준마의 상징은 스쿠델리아 페라리 레이싱팀의 공식 마크로 지정되어 1929년부터 페라리 자동차가 생산되기 시작한 이래 페라리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왔다.
0/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