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 수문제가 1차 고구려 침공에서 크게 패하고난 뒤
수나라는 고구려를 속국이 아닌 평등한 국격으로 대했고
고구려와의 패전에 의한 민심을 돌리기 위해
자신의 큰 꿈인 대운하 사업을 중지하고
지금의 베트남 지역을 두둘겨 패며 화풀이 중 이였다.
그러나 604년 수문제가 죽고 모략으로 형을 몰아내고 황제에 오른 놈이 있으니
이놈이 바로 수양제 이다.
수양제는 아버지 수문제와 달리 잔인하며 허영심 많고 오만했다.
수양제는 아버지때 민심때문에 그만두었던 대운하 사업을 다시 진행 하였고
깔짝 깔짝 겁만주며 약탈하던 베트남 지역을 무력으로 통합한다.
북으로는 위협이던 돌궐 또한 밀어내며 만리장성을 재축조 한다.
이런 수양제에게 고구려는 자신에겐 수치의 역사이며 눈에 가시 였다.
"고장국과 돌궐의 왕이 친히 방문하여 조공하였는데 고구려의 영양왕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속국이 해야할 일을 하지 않는것이다"라고 이야기 했다.
(꺠알 같은 GBS..ㅎㅎ)
3만 궁녀가 내 말만 하면 팬티를 벗는다는 팬티황제 수양제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큰 오판을 하였다.
자신의 아비가 오판하여 큰 패전의 아품을 준
그 당시 군사력 깡패 1등 국 고구려에게 태클을 건 것이다.
머 어쩌라고 ㅅㅂㄴㅁ
내가 니 시다바리가?
꼴리면 함 뜨든가!
고구려 영양왕의 입장은 명확 했다.
허 ㅆㅂ 선넘네?
이에 띵받은 수양제는 611년 군대를 모아 고구려를 침공하니
이게 2차 고구려-수나라 전쟁이다.
고구려의 당당함에 쪽팔리고 당황한 수양제는 어마어마한 병력을 모았으니
자그만치 백만 백만대군이였다.
뻥아니다. 삼국사기에 나온 내용을 빌려보면
"모두 1백 13만 3천 8백 명인데 2백만 명이라 하였으며, 군량을 수송하는 자는 그 배였다. (중략) 매일 1군씩을 보내어 서로 거리가 40리가 되게 하고 진영이 연이어 점차 나아가니, 40일 만에야 출발이 완료되었다.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지고 북과 나팔 소리가 서로 들리고 깃발이 960리에 걸쳤다. 어영(御營) 안에는 12위(衛)·3대(臺)·5성(省)·9시(寺)를 합하고, 내외 전후 좌우(內外前後左右) 6군을 나누어 예속시키고 다음에 출발하게 하니 또한 80리를 뻗쳤다."
라고 나온다.
군대가 도성을 빠져 나가는데만 40일이 결렸다 한다.
이는 세계1차대전 이전까지 최대규묘의 병력 동원이다.
어찌되었든 이 백만 대군은 평양성을 목표로 진격하게 된다.
그러나 멀리가지 못해 큰 복병에 부딛히니 그게 요동성이다.
요동은 지금의 지명으로도 남아있지만
중국본토에서 한반도로 들어오려면 무조건 거쳐야 하는 관문이고
백만의 군대를 이끌고 이 성을 지나치는것은 고구려군에게 후방을 내어 주는 일이니
후일을 위해서라도 이 성은 꼭 함락해야만 했다.
그리고하나 추가하자면 요동성은 그리크지 않은 성이였기에
수양제는 이를 가볍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수나라군은 승리의 기세를 몰아 요동성을 포위하고, 이를 공격했지만 좀처럼 함락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기록을 보면 요동성 내의 군사들이 가끔씩 나가서 싸우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다시 불리해지면 들어와서 성문을 닫고 버티기로 나갔고, 수나라군은 시간이 지나도 요동성 하나를 함락하지 못하며 본래부터 세웠던 전역의 그림이 모조리 엉망이 되어 버렸다. 도하에 성공한 양제는 요동성을 겹겹히 포위하며, 100만이면 함락은 시간 문제라고 판단했지만 요동성의 병력은 상당히 강한 저항을 했고 전쟁 내내 3개월간 수 양제의 공격을 버텨냈다.
아~씨바 조금 있으면 겨울인데 우짜냐 이거.
폐하~ 일부는 여기 남기고 육군 30만 만 빼서 평양으로 진격하고
수군까지 지원하면 아무리 고구려라 해도 뒷빵 걱정없이 승리할것으로 아뢰오~
백만의 군사를 가지고도 요동성 하나를 3개월동안 상처 하나 내지 못 한 수양제는
우중문, 우문술 지휘하에 30만 별똥대를 평양성으로 출동시키고
내호아의 수군과 합작하여 단번에 평양성을 함략시킬 계획 세우고 실행 한다.
그러나 이것은 크나큰 오판이였다.
ㅂ ㅅ 니 애비가 30만 끌고 들어왔다 다 죽어 나간건 기억하지?
성공한다면 위협적이었겠지만 보급에 문제가 많은 작전이었다. 별동대는 빠른기습 곧 기동성이 중요했는데 당시 수나라군은 30만 별동대에게 100일 분의 식량과 피복, 병장기, 야전텐트 등을 분배하여 운반하게 했다. 그런데 문제는 병사 1인당 군장의 무게가 무려 석 섬(약 50kg)이나 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 무식한 짐을 감당할 엄두를 내지 못한 수나라 병사들이 보급품을 길가에 버렸다. 특히 수나라 장수들은 군수품을 버리는 자는 목을 베어버린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수십만명의 병사들이 각자 작정하고 몰래 구덩이를 파 묻는 행위를 일일히 막을 방법은 없었다. 결국 별동대는 행군 중에 심각한 물자 부족을 겪었다.
병신들 똥을 싸네 아주..
이를 유심히 지켜본 고구려의 장수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들어봤나? 을지문덕!
수나라군이 압록강에 다다랐을때 직접 항복을 구실로 적진으로 들어갔으며
적진의 병사가 굶주림과 피로로 전투불능상태임을 확인하고 빠진다.
그리고 치고 빠지기 전술을 구사한다.
7번을 치고 빠진다.
수나라군은 제데로된 전투도 하지 못하고 전의는 완전히 상실되고 만다.
을지문덕은 이렇게 치고 빠지기를 계속하며
수나라의 병력을 평양성 30리 까지 끌고 들어온다.
설상가상 황해로 지원온 수나라의 수군은 고건무에게 대패하여 도망친다.
수나라 30만 별동대에게 더 이상의 보급은 없었다.
아~씨 집에 가고 싶다.
을지문덕은 이에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수나라군에 서찰을 하나 보낸다.
神策究天文 귀신같은 책략은 하늘의 이치(천문)를 깨달았고
妙算窮地理 신묘한 셈은 땅의 형편(지리)을 다하였도다
戰勝功旣高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 원컨대 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이게 그 유명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이다.
언 뜻 보면 상대를 높이 친송하는 듯 보이나
보급도 없이 전의를 상실한 수나라군을 뒤돌려까기로 조롱한 글이다.
한마디로 "그냥 졸라 병신 같은데 지지 오케이?" 인거다.
우중문은 답신을 보냈으며, 을지문덕은 이에 대해 다시 답신을 보내기를 '수나라가 군대를 물리면, 자신이 왕과 함께 항복하겠다.'는 확인 서한을 보냈다. 물론 그만한 지위에 올라간 우중문이 정말로 바보천치가 아닌 이상 이게 거짓말이라는 건 당연히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퇴각밖에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체면치레, 즉 수양제에게 변명할 거리 하나를 간신히 챙겼다고 생각하고 우중문은 그제야 퇴각을 결심했다
그러나 이 또한 을지문덕의 계략이였으며
다시는 저놈의 짱깨들이 이 나라 땅을 넘보지 않게 무참하게 도륙할 참이였다.
평양성 코앞까지 유인하기 위해 거짓후퇴만 거듭했던 그 때까지와는 반대로 본격적인 공세에 들어갔다. 사방에서 공격하여 수나라 군대를 쳐부수기를 반복했으며 수나라군은 방진을 치며 맞섰다.
고구려군의 계속되는 공격속에 약화될대로 약화된 수나라군 별동대는 지금의 청천강 일대인 살수에 간신히 도착했다. 수나라군이 도하를 시작하여 총병력의 절반쯤이 강을 건너는 순간, 고구려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전 병력을 집중시켜 최후의 총공격을 개시했다. 고대에서부터 현대전에 이르기까지 지상군이 제일 취약한 순간 중 하나가 도하 중일 때 이니 을지문덕의 전투 개시 시점이 절묘했다고 할 수 있겠다.
가장 먼저 희생된 것은 수나라 후군이었다. 수나라의 후위대는 고구려군의 맹공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고, 지휘관인 우둔위 장군 신세웅마저 전사할 정도로 철저히 박살났다. 그리고 후미의 이런 참담한 붕괴로 30만 대군 전체에 극도의 공포가 겉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패닉에 빠진 수군 장병들은 살기위해 서로 도주하면서 연쇄적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군대는 최소한의 편제와 통제가 무너지면, 30만 대군이 아니라 300만 대군이라 할지라도 먹잇감에 불과했다.
수나라군 전체가 와해되는 혼란 가운데서도 몇몇 수나라 부대는 감투정신을 발휘하기도 했다. 별동대의 지휘관 중 설세웅은 백석산에서 빗발치는 화살비와 포위망을 돌파하며 고구려군 일부를 격퇴하는 무용을 떨치기도 했고, 또 다른 지휘관 왕인공도 고구려군 일부를 물리치는 수훈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분전으로는 전황을 뒤집기에 턱없이 부족하여 거의 의미가 없었다. 30만 5,000명 중 살수(청천강)에서 빠져나와 압록강에 도착한 장병은 겨우 2,700명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수나라 30만 별동대가 2,700여 명만 남고 모조리 증발하였다. 그리고 남은 수나라군 총병력은 즉시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으로 2차 고구려-수 전쟁은 종결되었다.
잔존병력들이 간신히 본진에 도착하자 수 양제는 큰 충격을 받았고 대노(大怒)하여 우중문, 우문술을 쇠사슬로 포박하여 장안까지 끌고 갔고, 장안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을 서인(庶人)으로 전락시켜 감옥에 가두었다. 다만 우문술은 3차 고구려-수 전쟁 때 복권되어 참전했다. 특히 유사룡은 을지문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패전의 원흉으로 규정되어 참수되었고 머리가 효수되었다. 사실 패전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내호아는 정작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우중문/우문술도 죽음은 면했으니 괜히 애꿎은 유사룡만 패전의 희생양이 된 셈. 한편 별동대의 지휘관 중 하나였던 설세웅은, 추격해오는 고구려군을 맞아 종횡무진 활약한 공으로 포상을 받아 승진하기도 했다.
수 양제는 이후 3차, 4차 침공을 계속 이어갔으나 끝내 고구려 정벌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렇게 무리한 원정 탓에 그 끝을 모르던 수나라의 국력은 어느새 고갈되었고, 온 나라가 도탄에 빠지며 대규모 반란이 거듭 일어나 수 양제는 강도에서 근위병들에 의해 교살당하고, 수나라는 멸망했으며 양씨 황족들은 돌궐로 도망친 어린 황족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절멸당했다. 이로 인해 살수대첩 한 번으로 대제국을 말아먹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잼나네요,
잼나네요,
그러나 현재 중국은 저 치욕적인 역사를 묻어버리기 위해 고구려를 자기들의 역사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지켜야죠!!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를
이성이 평지성인데 보통 평지성은 방어력이 약해서 공성장비에 의해 대체로 무너지기 쉬운데 수나라군은 이거를 못함..
평소 요동성은 군량을 40만석을 쌓아놓고 싸운다고 함여...
상대가 아무리 이 성을 포위해놓고 장기전으로 가도 버틴다는 거임
평지성이라 포위하고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 생각한 거겠지요.
그 당시 고구려의 성들 중에는 작은 성은 아니였으나 수나라 입장에서 보면 군,민 합이 2만도 안되는 작은 성 맞습니다.
100:1의 전비를 이겨낸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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