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 4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의 다세대주택에서 집주인의 아들 최 씨(당시 32세)의 방화로 소방관 6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이다.
화재 신고가 최초로 접수된 후 가장 가까운 서울서부소방서(현 은평소방서)를 비롯 인근 소방서의 소방차 20여 대와 소방관 46명이 출동했으나 골목에 주차된 차량들로 인해 소방차가 진입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소방관들은 현장으로부터 100m 떨어진 곳에서부터 소방호스를 끌고 뛰어 진화를 시작했다.
그 시각 구조대도 현장에 도착했다. 구조대원들은 화재진압대가 먼저 현장에 도착할 수 있도록 다른 진입 경로로 현장에 접근하려 했지만, 폭 6m 남짓한 좁은 이면도로에 주차된 차량들이 너무 많아 구조차량이 도저히 진입할 수 없어 5명의 구조대원들이 25kg이 넘는 장비들을 직접 들고 200m 가량을 달려 도착했다.
이후 연희소대가 현장 근처에 도착했지만, 마찬가지로 골목길에 주차된 차들에 의해 접근이 어렵자 15m 남짓 소방호스 12개를 이어붙여 가까스로 진화 작업에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며 진화 시작 5분여 만에 집주인 및 세입자 가족 등 7명을 무사히 대피시켰다.
그때 집주인이자 방화범 최씨의 어머니 선씨의 "내 아들이 안에 있다"는 주장에 이미 화마로 뒤덮힌 2층집으로 먼저 '구조1조'의 소방관 3명이이 진입했으나 아들 최씨는 발견되지 않았고 그렇게 1차 수색이 종료되었다.
그런데 집주인 선씨가 "사람이 안에 있는데 왜 구하지 않느냐”고 했고 구조1조 소방관 3명과 녹번 2소대 소방관 3명 홍은소대 소방관 2명 그리고 2조의 소방관 2명이 당시 방화복이 아닌 방수복(비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조 대상자가 있다는 말 한마디에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녹번 2소대와 홍은소대, 그리고 구조1조, 구조 2조의 10명이 구조 대상자를 찾기 위해 건물로 들어간 오전 4시 11분, 꽝 하는 소리와 함께 2층 주택 전체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소방관 10명이 무너진 건물 속에 그대로 매몰되었으며, 인근에 있던 소방관 3명도 날아온 파편에 맞아 쓰러진다.
건물이 붕괴된 직후 다른 화재 신고 장소에 갔다 뒤늦게 도착한 녹번1소대와 이후 출동한 시내 11개 소방서에서 도착한 구조대원 200여 명은 소방호스 대신에 삽과 망치를 들고 필사적인 구조작업을 벌여 3명의 소방관을 구조했으나 나머지 6명은 끝내 숨진 채 발견됐다.
-나무위키 퍼옴
지방소방교 김철홍 - 본래 내근직이었으나, 현장 근무를 하면 지급되는 추가 수당으로 아픈 어머니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현장 근무를 했다고 한다.
지방소방교 박상옥
지방소방교 김기석
지방소방사 장석찬
지방소방사 박준우 - 순직 당시 결혼을 딱 1주일 앞둔 예비 신랑이었다. 사후 장기기증을 했다고 한다.
방화범의 정체와 범행 동기
-방화범인 집주인 아들 최씨(32)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불이 나기 한 시간 쯤 전인 전날 새벽 2시 반쯤 술에 만취한 채 귀가해, 자신을 야단치는 어머니 선씨와 다투다 주먹을 휘둘렀고, 최씨는 어머니가 자신을 피해 윗층으로 몸을 숨기자 화가 풀리지 않아 방안에 있던 생활 정보지에 불을 붙였다고 자백했으며, 불길이 크게 번지자 겁이 난 최씨는 친척집으로 달아났다 4일 오후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최씨의 자백에 따라 방화와 존속상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이후 현주건조물방화 및 상해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재판 결과 최씨는 1989년경부터 정신질환으로 세 차례 입원 치료를 받은 전적으로 인해 심신미약 등이 인정되어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정상적으로 형을 모두 마쳤다면 2005~6년 쯤에 만기 출소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정확한 근황은 불명이다. 다만 전과자인데다 그 죄질도 죄질이거니와, 정신 상태도 온전치 못한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삶은 영위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바뀐 점
-당시에 소방관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가 알려졌고, 이때부터 점차 개선되기 시작했다.
먼저 당시 근무 형태는 24시간 맞교대로 격일 근무였는데, 참사 후 3교대로 바뀌었다. 또한 기존에는 방화복이 없어 방화복 대신 방수복인 비옷을 입었지만, 방화복을 구매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줬다. 그리고 사회가 PTSD에 대해 관심이 높아졌으며, 가장 큰 변화로는 의무소방대가 창설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소방관들 사이에서는 '소방관의 처우는 홍제동 전과 후로 나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
2001년 7월에 종전 청록색 기동복, 하늘색 구급복, 주황색 구조복이 시인성 문제가 거론되어 소방의 시그니처 컬러인 주황색 기동복(남색 옷깃)으로 통합되었다.
그시절 집이 역촌동이고, 회사가 을지로여서 여기 소방서 매일 버스로 왔다갔다 했었어요. 검은색 현수막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 꽤 오래 붙어있었고, 사람들도 지나다니며 묵념하고 그랬었어요. 꼬꼬무에서 소방서 나올때 여기구나 싶었었죠... 아직도 생생한데 벌써 20년전이라니... 다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들이 방화범 이었다는건 잊고 있었어요. 세월이 무섭네요. 그 시절에도 빌또 또 빌었지만,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꼬꼬무 방송을 보았습니다
눈은 오고 구조한 동료가 사망했다는 사망소식이 하나둘 들려오고 있고
현장에 요구조자가 없다는 소식이 전파될때까지 멈출수 없었던
손을 그제서야 놓고 주저앉아서 울던 소방관을 다른 동료가 달래주시는거 보는데 하아... 정말.....
가족이 안에 사람이 있다고 하는건 신뢰 할수밖에 없다 들어갈수 밖에 없다고 하시는데 하아... 정말....
화재 신고가 최초로 접수된 후 가장 가까운 서울서부소방서(현 은평소방서)를 비롯 인근 소방서의 소방차 20여 대와 소방관 46명이 출동했으나 골목에 주차된 차량들로 인해 소방차가 진입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소방관들은 현장으로부터 100m 떨어진 곳에서부터 소방호스를 끌고 뛰어 진화를 시작했다.
그 시각 구조대도 현장에 도착했다. 구조대원들은 화재진압대가 먼저 현장에 도착할 수 있도록 다른 진입 경로로 현장에 접근하려 했지만, 폭 6m 남짓한 좁은 이면도로에 주차된 차량들이 너무 많아 구조차량이 도저히 진입할 수 없어 5명의 구조대원들이 25kg이 넘는 장비들을 직접 들고 200m 가량을 달려 도착했다.
이후 연희소대가 현장 근처에 도착했지만, 마찬가지로 골목길에 주차된 차들에 의해 접근이 어렵자 15m 남짓 소방호스 12개를 이어붙여 가까스로 진화 작업에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며 진화 시작 5분여 만에 집주인 및 세입자 가족 등 7명을 무사히 대피시켰다.
그때 집주인이자 방화범 최씨의 어머니 선씨의 "내 아들이 안에 있다"는 주장에 이미 화마로 뒤덮힌 2층집으로 먼저 '구조1조'의 소방관 3명이이 진입했으나 아들 최씨는 발견되지 않았고 그렇게 1차 수색이 종료되었다.
그런데 집주인 선씨가 "사람이 안에 있는데 왜 구하지 않느냐”고 했고 구조1조 소방관 3명과 녹번 2소대 소방관 3명 홍은소대 소방관 2명 그리고 2조의 소방관 2명이 당시 방화복이 아닌 방수복(비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조 대상자가 있다는 말 한마디에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녹번 2소대와 홍은소대, 그리고 구조1조, 구조 2조의 10명이 구조 대상자를 찾기 위해 건물로 들어간 오전 4시 11분, 꽝 하는 소리와 함께 2층 주택 전체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소방관 10명이 무너진 건물 속에 그대로 매몰되었으며, 인근에 있던 소방관 3명도 날아온 파편에 맞아 쓰러진다.
건물이 붕괴된 직후 다른 화재 신고 장소에 갔다 뒤늦게 도착한 녹번1소대와 이후 출동한 시내 11개 소방서에서 도착한 구조대원 200여 명은 소방호스 대신에 삽과 망치를 들고 필사적인 구조작업을 벌여 3명의 소방관을 구조했으나 나머지 6명은 끝내 숨진 채 발견됐다.
-나무위키 퍼옴
지방소방장 박동규
지방소방교 김철홍 - 본래 내근직이었으나, 현장 근무를 하면 지급되는 추가 수당으로 아픈 어머니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현장 근무를 했다고 한다.
지방소방교 박상옥
지방소방교 김기석
지방소방사 장석찬
지방소방사 박준우 - 순직 당시 결혼을 딱 1주일 앞둔 예비 신랑이었다. 사후 장기기증을 했다고 한다.
방화범의 정체와 범행 동기
-방화범인 집주인 아들 최씨(32)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불이 나기 한 시간 쯤 전인 전날 새벽 2시 반쯤 술에 만취한 채 귀가해, 자신을 야단치는 어머니 선씨와 다투다 주먹을 휘둘렀고, 최씨는 어머니가 자신을 피해 윗층으로 몸을 숨기자 화가 풀리지 않아 방안에 있던 생활 정보지에 불을 붙였다고 자백했으며, 불길이 크게 번지자 겁이 난 최씨는 친척집으로 달아났다 4일 오후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최씨의 자백에 따라 방화와 존속상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이후 현주건조물방화 및 상해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재판 결과 최씨는 1989년경부터 정신질환으로 세 차례 입원 치료를 받은 전적으로 인해 심신미약 등이 인정되어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정상적으로 형을 모두 마쳤다면 2005~6년 쯤에 만기 출소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정확한 근황은 불명이다. 다만 전과자인데다 그 죄질도 죄질이거니와, 정신 상태도 온전치 못한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삶은 영위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바뀐 점
-당시에 소방관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가 알려졌고, 이때부터 점차 개선되기 시작했다.
먼저 당시 근무 형태는 24시간 맞교대로 격일 근무였는데, 참사 후 3교대로 바뀌었다. 또한 기존에는 방화복이 없어 방화복 대신 방수복인 비옷을 입었지만, 방화복을 구매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줬다. 그리고 사회가 PTSD에 대해 관심이 높아졌으며, 가장 큰 변화로는 의무소방대가 창설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소방관들 사이에서는 '소방관의 처우는 홍제동 전과 후로 나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
2001년 7월에 종전 청록색 기동복, 하늘색 구급복, 주황색 구조복이 시인성 문제가 거론되어 소방의 시그니처 컬러인 주황색 기동복(남색 옷깃)으로 통합되었다.
-나무위키 퍼옴-
상세글정보 감사합니다.
문신한사람과 문신충은 다름
배달부랑 딸배도 다름
창밖이 벌겋게 보이고.. 자다가 깼음
언제 바뀔런지
뭐가 문제야 도대체가
눈은 오고 구조한 동료가 사망했다는 사망소식이 하나둘 들려오고 있고
현장에 요구조자가 없다는 소식이 전파될때까지 멈출수 없었던
손을 그제서야 놓고 주저앉아서 울던 소방관을 다른 동료가 달래주시는거 보는데 하아... 정말.....
가족이 안에 사람이 있다고 하는건 신뢰 할수밖에 없다 들어갈수 밖에 없다고 하시는데 하아...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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