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릴때 광주에서 살았는데 수십년만에 출장와서 5.18묘역에 왔습니다.
1980년 5.18때 전남 도청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어린나이에 본것이 많았요.
그때의 기억을 잊어버리려고 해도 일베,틀딱들의 빨갱이 타령과
국짐당 당선. 미얀마 사태를 보면 기억이 자꾸 떠오릅니다.
1980년 5월 16일이 시작이었을겁니다.
갑자기 시내가 시끄러워지더니 시민들이 스피커로
전두환 쿠테타 반대 방송을 하고 광주가 봉쇄되었습니다.
그리고나서 학교에서 등하교 금지령이 내려지고 전기.전화.방송이 끊겼습니다.
약 1주일가량 총소리와 최루탄이 하늘을 뒤덮었는데
저는 집안에서만 생활해야 했습니다.
밖에 나가면 언제 어디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니까
시민들과 진압군이 저를 보면 집안으로 들어가라고 야단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릴때는 호기심이 많아 그렇게 안되지요.
도청앞에 사람들이 날마다 줄맞춰서 누워있는것을 봤는데 알고보니 시채들이었습니다.
집 근처에서 진압군과 학생들이 쫏고 쫏기는 것을 여러번 봤고
지프차 뒷범에 사람의 양손을 묶어 질질 끌고 다니는 것도 봤습니다.
피부가 벗겨져서 사람인지 분간이 안될정도 였는데
머리카락 길이를 보고 여자라는 것을 알았지요.
나중에 그 시신이 전두환 쿠테타 반대를 외치던 여대생이라는 소문을 들었지요.
지금도 5.18방송영상을 보면 그 여자분의 육성이 남아있지만 생사여부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당시 충장로 1가 우체국 근처에서 누군가를 기더리던 만삭의 신혼 임산부를
진압군이 아무 이유없이 복부를 수차례 찔러 죽였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 분이 24살의 최미애씨였습니다.
지금은 5.18묘역 안장되었는데 결혼식 때 웨딩드레스를 입고
찍은 사진이 비석에 있네요.
당시 전두환은 5.18이 간첩침투 사건이라고 발표하고
진압군의 시민학살도 모조리 유언비어라고 우겼었죠.
5.18민중가 중에서 '트럭에 싣고 어디갔니'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광주시민들은 그곳이 광주 교도소주변 망월동과 너릿재 근처라고 생각합니다.
5.18이 끝나자 마자 전두환은 광주지역에 선심쓰듯
광주와 화순군 사이의 너릿재 터널 주변도로를 확장해 주었습니다.
그 도로밑에 처형한 시신을 묻어두고 도로로 덮어버리려 했던 것이라
시민들의 반대가 많았지만 군사정권시절이라 그냥 밀어 부친거지요.
지금까지도 도로를 파서 확인 할 수 없어 영원히 묻혀버렸습니다.
지금 빨갱이 타령하며 5.18 비하하는 인간들은 참 미련한 인간들입니다.
5.18 이전에 서울에서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집회가 있었고 부산.마산에서도 있었지요.
그런데 5.18때는 시민들이 더 강력하게 저항했고, 군부정권도 더 강하게 대응하려다가 대량학살을 했던건데
보수파라는 인간들은 경상도가 한것은 부마 민주화 항쟁이고, 광주가 한것은 빨갱이라고 하지요?
코딱지만한 나라에서 지역 이간질을 조장하는 정치인들에게 속아 뭔짓을 하는건지 모르겠습니다.
타지멱민들은 전라도 사람들이 민주당만 뽑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많지요.
그런데 민주당이 좋아서 뽑는게 아니라 반대편이 싫어서 민주당만 뽑는 겁니다.
지금 보수파라는 경상도 사람들은 무작정 자기 지역당만 뽑지요.
그게 다릅니다.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미얀마 사태를 보면
미얀마 국민들은 5.18때 광주 사람들 보다 더 낫다고 봅니다.
지금은 스마트폰이 보급되서 증거를 남길수 있고 기록이 가능하니까요.
아직까지 집단처형이나 고문은 없으니까요.
5.18때는 아무 기록없이 실종된 사람들과 소문만 무성했는데
그나마도 증거가 부족해 아예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오랫만에 와서보니 너릿재부근에 위령비가 세워져있네요.
어제는 바빠서 그냥 지나쳐왔는데 오늘은 헌화하고 올라가야겠습니다.
추천...!!
지금의 언론에서 거론하기에는 너무 잔인한 내용이고
어린이 교과서에 구체적으로 실을 수도 없기 때문에 국민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과서에 적힌 정도의 내용만 알고 있습니다.
대안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영남인들은 나라를 팔아먹어도 그당을 찍는다고 당당히 얘기합니다.
나라를 잃어더라도 전라도정권은 싫은겁니다
신라가 고구려를 당나라에 바치고 백제를 쳐먹은 이유가 dna로 내려온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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