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구국 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日帝)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
둘째는 전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 평화 위에
세계 일가(一家)의 인류공존을 이룩함이니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 주시오.”
- 백정기 의사, 1933년 3월 17일
주중 일본공사 처형에 나서기 전 -
1932년 상하이에서 자유 혁명자 연맹을 조직하여 흑색 공포단으로 개칭하고, 조직을 강화하여 대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사건 당시에 구파 의사도 동일한 시도를 준비했었으나 중국인 조력자인 왕야차오가 권총은 전달했으나 약속했던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실패하였다. 이것이 나름 흥미로운 사건인데, 윤봉길 의사는 당일 오전 11시에 폭탄을 터트릴 계획을, 백정기 의사는 오전 10시에 터트릴 계획을 하고 훙커우 공원으로 향했지만 입장료를 준다는 중국인 동지의 배신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백정기 의사는 애써 준비한 거사가 물거품이 된것에 분노했다고 전해진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지만, 백정기 의사가 계획대로 폭탄을 던지고 성공했다면 현재 윤봉길 의사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가 백정기 의사한테 향했을지도 모른다.
1933년 3월 상하이 훙커우에서 정현섭, 원심창, 이강훈 등의 아나키스트 동지들과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를 암살하려고 모의한 육삼정 사건으로 잘 알려진 아리요시 아키라 공사 암살 미수 사건을 도모했다가 육삼정에서 체포되었다. 당시 상해 일본 총영사 보고문에서 일본제국 경찰의 세밀한 사전 체포 계획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컨대 아마 의거가 사전에 누군가에게 누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나가사키로 이송되어 나가사키 법원에서 백정기 의사와 원심창은 무기 징역을, 이강훈은 징역 15년 형을 언도받았다. 백정기 의사는 이사하야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병으로 옥사하였다.
"나는 몇 달 더 못 살 것 같소.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 마오.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오.
형들은 자중자애하며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겨레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라오.
평생 죄송스럽고 한 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혀지지 않을 뿐이고,
조국의 자주 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 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 바라오."
- 백정기 의사의 유언
목숨바쳐 지켜주신 이 나라, 그 뜻을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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