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서 급발진 의심 사고 잇따르는데 소비자 최종 승소 사례 '제로'

입증 책임 '소비자→제조사' 현행법 개정 절실…국회서 법안 계류 중

도현이 가족 "수천만원 들여 입증 책임 다했는데 인정 안 돼" 분통


(강릉=연합뉴스) 박영서 강태현 류호준 기자 = 2022년 12월 강원 강릉에서 이도현(사망 당시 12세)군이 숨진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의 진실 규명을 위해 유가족이 제조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나 13일 고개를 떨궜다.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결함 원인 입증 책임을 오롯이 소비자가 짊어져야 하는 현행 제조물 책임법상 할 수 있는 수많은 기술점 감정을 다했으나 기울어진 운동장을 극복하지 못했다.


전국에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가 잇따르는 가운데 손해배상 소송에서 결함 입증 책임 주체를 '소비자→제조사'로 전환하는 제조물 책임법 일부개정법률안, 이른바 '도현이법'이 제정되지 않는 이상 급발진 소송에서 소비자 측이 승소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경찰서 나서는 급발진 의심 사고 할머니

(강릉=연합뉴스) 2022년 12월 강릉에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로 12살 손자를 잃고,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입건된 할머니가 2023년 3월 경찰조사를 마치고 아들의 부축을 받으며 경찰서를 떠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백전백패' 다름없는 급발진 소송…소비자 승소 확정판결 '0'


더불어민주당 허영(춘천·철원·화천·양구갑) 의원이 한국교통안전공단으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자동차 리콜센터가 2010년부터 2024년 3월까지 14년간 접수한 급발진 의심 사고는 791건이다.


그러나 이 중 급발진으로 인정된 사례는 단 1건도 없었다.


또한 현재까지 급발진 의심 사고로 인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제조사가 배상 책임을 진 사례는 하급심 판결 4건 외에 대법원 최종 판결로는 단 1건도 없었다.


하급심 판결 중 익히 알려진 사례는 2018년 5월 호남고속도로에서 발생한 BMW 차량 급발진 의심 교통 사망사고다.


당시 유족 측은 BMW코리아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1심 재판에서 패소했으나 항소심 재판부는 BMW코리아 측에 '유족에게 각 4천만원씩 배상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다.


1심은 운전자 측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차량을 정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상태에서 사고가 발생했다고 단정하기 부족하다고 봤지만, 2심은 정상적인 운행 중 제조사의 배타적 지배하에 있는 영역에서 사고가 발생했다고 봤다.


다만 이 사건 역시 대법원에 상고심이 계류 중으로 국내에서 급발진과 관련해 차량 제조사 책임을 인정한 확정판결은 현재까지 없으며, 해당 BMW 차량은 2008년식으로 자동 긴급제동 보조 시스템(AEB) 등 첨단운전자보조시스템(ADAS)이 장착된 고성능 차량은 아니다.


해외에서는 '북아웃 소송'이라 불리는 급발진 소송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사건 재판은 2007년 9월 진 북아웃이 몰던 캠리 승용차가 오클라호마주 고속도로 출구에서 급발진하면서 장벽을 충돌해 운전자는 중상, 동승자 1명은 숨진 사건에서 시작됐다.


2013년 미국 오클라호마주 1심 법원 배심원단은 이 사고가 차량의 전자식 엔진 조절 장치의 불량으로 말미암았다며 피해자들에게 300만 달러(31억8천만원)를 배상하라는 평결을 내리고 '징벌적 손해배상금'을 산정하려 하자 도요타 측은 곧바로 피해자들과 합의했다.


소송 당시 소프트웨어 컨설팅업체 바그룹(Barr Group)이 도요타 캠리의 급발진이 엔진스로틀컨트롤시스템(ETCS)의 소프트웨어 결함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분석한 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 선처 탄원서

(강릉=연합뉴스) 2022년 12월 강릉에서 발생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의 책임 소재를 둘러싼 민사소송의 첫 재판이 열린 2023년 5월 23일 사진은 전국에서 모인 탄원서 1만7천여부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 법 개정 움직임에도…여전히 '영업비밀'에 가로막힌 소비자들


현행 제조물 책임법은 '제조물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는 상태에서 손해가 발생한 사실' 등을 증명하면 제조물에 결함이 있었고, 그 결함으로 인해 손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피해자의 입증 책임을 경감하기 위해 2017년 개정된 것이지만, 차량처럼 갈수록 기술이 고도화되는 제조물은 비전문가인 소비자가 입증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소비자가 결함을 입증하려고 해도 설계도면 1장조차 영업비밀을 이유로 제공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현이 가족의 사고를 계기로 지난 21대 국회에서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 5건이 발의됐으나 '입법례가 없으며, 산업계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이유로 상임위 문턱도 넘지 못한 채 결국 임기 종료와 함께 폐기됐다.


현 22대 국회에서도 현재까지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 8건이 발의된 상태다.


이들 법안 모두 고도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제조된 제조물의 경우 일반 소비자가 결함을 입증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따라 결함 입증 책임을 소비자에서 제조사로 전환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또 일반 소비자들이 제조물과 관련된 자료에 접근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해 민사소송법상 문서제출명령보다 강화된 자료 제출명령 내용을 담고 있는 법안도 있다.


영업비밀이라 할지라도 결함 증명과 손해액 산정에 반드시 필요하면 자료 제출을 거부할 수 없도록 하고, 제출명령 불응 시 해당 자료를 통해 증명하고자 하는 사실을 진실한 것으로 인정한다는 취지다.


즉 제조사가 영업비밀을 이유로 자료 제출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일을 막고, 소비자의 입증 부담을 완화하고 피해구제의 실효성을 높이겠다는 의도다.


다만 법안을 검토한 국회 정문위원회 전문위원은 이 같은 개정안 내용들이 '공평의 이념' 원칙에서 바람직한지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등 의견을 내 법안 통과까지는 이해당사자들 간 충분한 숙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할머니는 페달 오조작을 하지 않았다"

(강릉=연합뉴스) 2022년 12월 이도현(사망 당시 12세) 군이 숨진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와 관련해 2024년 5월 27일 오전 강원 강릉시 강릉교회 티지홀에서 도현이 가족의 소송대리를 맡은 법률사무소 나루 하종선 변호사가 지난달 이뤄진 국내 첫 재연시험의 감정 결과를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 도현이 가족 "국민 지키는 법 왜 없나"…도현이법 제정 촉구


도현이 가족이 입법 청원한 '도현이법' 역시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해당 법안은 입증 주체를 '소비자→제조사'로 전환하는 데 있어 개정 유럽연합(EU) 제조물 책임법 지침을 반영한 입증책임 전환 조항 신설, 결함에 대한 증명 정도를 고도의 개연성(80∼90%의 확신)을 증거의 우세함(50%+α)으로 낮춤에 더해 자동차안전연구원 수석연구원이 고안한 비상정지 장치 장착 의무까지 담고 있다.


특히 EU가 지난해 3월 확정한 제조물 책임법 지침 조항(제10조 4항)인 '소비자인 원고가 기술적 또는 과학적 복잡성으로 인해 제품의 결함과 인과관계를 입증하기가 과도하게 어려운 경우 결함과 인과관계를 추정해서 입증 책임을 소비자에서 제조사로 전환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점이 눈에 띈다.


도현이 가족의 소송대리를 맡은 법률사무소 나루 하종선 변호사는 13일 재판이 끝난 뒤 '도현이법' 제정을 재차 촉구했다.


하종선 변호사는 "우리나라 국민이 급발진 사고로 죽어 나가도 언제까지 제조사 대신 운전자가 그 모든 책임을 감당해야 하냐"며 "결함 입증을 위해 수천만의 자비를 들였는데 비과학적인 판결로 인정되지 않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도현이법은 제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소비자는 소프트웨어 알고리즘에 어떤 요소가 포함돼 있는지 알 수 없고, 소프트웨어 특성상 결함이 발생하더라도 흔적이 남지 않아 결함 입증이 어렵다"며 "국민과 소비자가 일방적으로 피해를 감수해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다.


도현군 아버지 이상훈씨 역시 "제조사는 침묵으로 진실을 숨기고, 국가는 외면으로 방조하며, 법은 기업 편에 선다"며 "국민을 지키는 법이 왜 존재하지 않느냐"고 토로했다.


오열하는 강릉 급발진 소송 원고 측

(강릉=연합뉴스) 류호준 기자 = 13일 오후 강원 강릉시 난곡동 춘천지법 강릉지원 앞에서 고(故) 이도현 군 아버지 이상훈씨가 재판을 마친 뒤 오열하고 있다. 이날 춘천지법 강릉지원 민사2부(박상준 부장판사)는 도현이 가족 측이 KG모빌리티(이하 KGM·옛 쌍용자동차)를 상대로 제기한 9억2천만원 규모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2025.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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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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